비평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③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를 생각하면 한 편으로 강력한 코미디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었나 싶다. 하드 코어 포르노를 표방한 후기작 <감각의 제국>이나 괴담에 가까운 <열정의 제국>을 보아도 이것은 일종의 장난, 연극, 퍼포먼스, 행위예술의 바운더리를 넘나든다. 특히 <감각의 제국>같은 영화는 미시정치의 가장 간략하고도 이상적인 것을 스스럼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턱없이 순진한 코미디를 떠올리게까지 만든다('조금만 더, 아니 조금만 더, 이렇게? 이건 좋아? 아니 그렇게까지 하진 마. 그건 위험해. 하지만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그게 나도 좋아'같은 대사를 듣다 보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서로 간에 상대를 배려하려는 안간힘이 얼마나 눈물날 정도로 애절한지 느낄 수 있다. 이 한없이 위험한 놀이에 참여하다보면 이 영화는 포르노보다는 신파에 가까워진다. 눈물 섞인 웃음이라고 하는 요소가 포르노그래피를 표방한 영화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점은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다).

 

호기심과 장난어린 충동으로 시작한 소꿉놀이 같은 것이 점차 반복을 거쳐 생과 사의 경계선으로 몰아가는 것, 오시마 감독은 순진하거나 철없는 발상에 몰두하여 오로지 그에 충실한 인간의 삶을 더 없이 가벼운 어떤 것으로 그린다. 물론 그것은 자조적인 것이기도 하다. 국가에 대한 총체적인 부정의식이 일본의 역사를 헤집고 들어가 난잡한 코미디로 만들어버리려는 욕망으로 연결된 것인지 그는 천황을 향한 진지한 할복자살을 개죽음으로 만들어버린다거나(의식), 칼과 총에 대한 오래된 애착을 성적 불감증의 이력으로 본다거나(동반자살 일본의 여름), 전통의 가문을 파헤쳐 완전히 콩가루 집안임을 밝혀낸다거나(의식, 그 여름날의 누이) 하는 굉장히 흉폭한 난장꾼 같은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시마가 이 모든 아수라장의 상황을 컬트적으로 묘사하는 데만 치중한 감독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그것은 그가 실제로 영화의 운동, 그 불가능한 집단의 혁명에 공멸을 주장하면서도 항상 선두에 서왔다는 점에서 확실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확고한 부정의식에 대한 실천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된다.

 

그는 영화에서 모든 패배담에 대한 제 3의 화자,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그 사건 속에 완전히 연루되지 않은 정신적 히피의 존재를 반드시 상정해놓는다. 그것은 일종의 동시대성에 대한 의식이기도 할 것이다. 그 존재들이란 어른보다 더 일찍 철이든(그래야만 했던) 소년과 소녀들이며 후텐족 젊은이들이거나 전위 예술가들이기도 하다. 게다가 극우파로부터 극좌파까지 양극단적 역할을 동일한 배우들을 사용함으로써, 즉 2-30년에 걸쳐 극단처럼 배우들을 운용함으로써 자신의 영화가 하나의 공연의 형식을 띈 지속된 운동임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오시마는 <그 여름날의 누이>(1972) 이후로 동시대극을 찍지 않았다고 말해지지만 그의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1983)에 관련한 인터뷰를 보면 언제나 동시대적 고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하라 중사나 요노이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세대이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오히려 로렌스 장교의 입장과 같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시선으로 이 영화를 찍은 것이다).

국가와 제도의 권력에 압도된, 집단의 한 부분으로서의 국가적 인간형이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고유한 개인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오시마의 근본적 모토이다. 그 과정의 치열함을 국가 내부적으로 최대치로 보여준 것이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교사형>과 <신주쿠의 도둑 일기>이다(외부적으로 투사함으로서 그 해결책을 찾는 과정은 그가 프랑스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감각의 제국>이후의 제작방식과도 맞물리는 것으로, 그 후의 작품들의 주제의식 또한 그러한 성격을 띠고 있다). <신주쿠의 도둑 일기>(1969)는 앞서 말한 만드는 자와 보는 자에 대한 시대 인식의 차이를 대범하게 드러내는 작품으로 일견 60년대 영화의 모던한 장치들을 다소 산만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신주쿠라는 당대의 문화적 해방구라는 장소의 성격과도 맞물리는 것이다. 당시 신주쿠는 정치적 불안감 속에 문화 예술이 자라나던 곳으로 대중문화와 인디 문화가 공존하던 카오스와 같은 거리였다. 문학가와 예술가, 비평가들의 활발한 교류의 장이 꽃폈고 영화에는 실제 신주쿠 거리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예술가들이 직접 출연하고 있다(영화의 해설자처럼 등장하는 히피족 청년은 실제 유명한 상황 극단의 리더였고, 서점도 60년대 신주쿠에서 유명한 역사 깊은 서점이고 사장도 직접 출연했으며, 가짜 서점 직원으로 출연하는 여자는 실제 신주쿠에서 유명했던 디자이너이며 남자 주인공을 비롯한 조연 배우들 모두 신주쿠 거리에서 활동하던 연극단원들이었다. 오히려 이 영화의 바깥에서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이 배우들인 것은 특이한 요소이다).

 

가짜 서점 직원행세를 하며 남자와의 섹스를 동경하는 여자와 무동기적으로 책을 도둑질을 하는 남자가 만나 신주쿠 도시를 종횡무진 누빈다. 그들은 서점을 거점으로 하여 사상과 성의 동시적 해방을 꿈꾼다. 그들은 성심리학자를 만나 상담받기도 하며 실제 오시마 프로덕션의 배우들로 구성된 시네마 베리떼적인 섹스 실험에 참여하기도 하고, 상황 극단 배우들과 함께 성 퍼포먼스에 참여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오시마 영화는 남성성을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여성이 오히려 특별한 상징적 위치에 있다. 어느 밤 여자가 몰래 들어간 서점에서 장 주네의, 체 게바라의, 프란츠 파농의 서적 등을 줄줄이 뽑아 한 가운데 쌓아 일종의 혁명에 대한 관념적 의식을 치른다. 퍼포먼스 연극의 말미에서는 여자가 생리혈로 배에 할복자살을 시늉하며 가임되지 않은 실패의 상징으로서의 자살행위를 암시한다. 가히 성에 대한 당대의 모든 담론을 끌어들여 68년의 정치적 열기와 전위적 문화의 담론을 연동적으로 배치하려했던 최대한의 실험극인 것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에서 세계 시간과 일본 시간을 병치시키는 방식은 세계의 동시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엔딩에선 당시 신주쿠에서 벌어진 '국제반전의 날'에 벌어진 전학련의 경찰서 투석 사건에 대한 기록 영상을 배치한다. 여기서 여자가 연극을 벌인 후 시계를 향해 던진 돌이 정확히 그 기록물 영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투쟁에 합류된다. 이처럼 <신주쿠의 도둑 일기>는 전 세계적으로 동시대에 벌어진 68년의 혁명과 투쟁의 시간을 상기하며 그 운동의 횡단성을 강조하려했던 오시마의 관념적 정치 운동의 결과이며 당대 문화의 전위성을 여과 없이 그대로 끌어들여온 일례 없는 실험영화가 된 것이다.

당대의 센세이션한 것, 투쟁과 각종 범죄 사건들에 대한 거의 저널리즘적인 통찰에서 비롯된 오시마의 영화들은 언제나 그 사건의 재구성에 있어 직접 연기(재연)해보려고 하는 행동적 의식이 동반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영화마다 등장하는 신문의 사건 사고 란의 머리기사들은 마치 할리우드의 필름 누아르처럼 사회 반영적인 장치를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경우일 것이다. 오시마는 범죄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투쟁이나 범죄 현장 내부로 끌어들인 후 그 중 가장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히피적 캐릭터에 우리의 시선을 위치시킨다. 이것은 외부자의 시선이 아닌 내부적으로 가장 객관적인 위치를 확보하는 일이기에 특별한 설득력을 지닌다. 가히 스즈키 세이준에 버금갈만한 컬트성을 확보하고 있는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1967)이나 최고의 아동 신파극이라 불려도 좋을 <소년>(1969)같은 작품은 오시마의 영화에서 반드시 언급해야할 중요한 작품으로 이 역시 실제 외국인 무기 쟁탈 사건과 소년을 이용한 교통사고 자해 공갈단 가족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은 후텐족 소녀의 기이한 퍼포먼스로 시작한다. 뙤약볕 아래 온통 공사 중인 도시가 보이고 이어 하얀 페인트가 온 도시의 공간에 동시적으로 칠해진다.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한다. '나도 칠해줘'. 이 하얀 손의 모형으로 눈을 가린 소녀가 흰 속옷을 강물에 벗어던지자 개구리헤엄을 치는 남자들이 흰 일본의 국기를 등에 업고 갑자기 떼거지로 헤엄을 쳐 올라온다. 이어 대로 변에 두 사람의 사고 흔적이 하얀 페인트로 그려져 있고 승려들이 이 주변을 뱅뱅 도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이어 국적을 알 수 없는 군복을 입은 채 일본 나막신을 신은 한 이름 없는 남자가 그 흔적 위에 몸을 포갠다. 초반부터 성적 열망을 드러내며 '나와 자자'를 반복하는 소녀는 그 옆의 사람은 분명 여자였을 것이라며 자신의 속옷을 그 위에 얹는다. 와카마츠 코지의 <가라 가라 두 번째 처녀>에서 동반자살의 엔딩 장면과도 맞물리는 느낌이 있다. 여하간 이 정체모를 이상한 남녀는 바닷가에 정사를 하러 갔다가 총기를 몰래 수거하는 야쿠자 집단을 보게 되고 그들에게 볼모로 잡혀가게 된다. 이 곳에서 이들은 인질로 잡혀온 역시 수상한, 그러나 다양한 연령대와 출신배경을 자랑하는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소녀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에 총기에 집착을 보이는 열일곱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이 소년과 소녀가 총을 훔치기 위해 야쿠자 집단의 집결지 같은 곳을 계속하여 열어보는 장면이 잠시 있다. 이 장면은 장난처럼 보이지만 얼핏 드리우는 그들의 집결된 모양새나 진지한 표정 같은 것은 이들이 범죄 집단인지 혁명가 집단인지 그 실체를 알 수 없게 묘사되어 있다. 여하튼 이 짧은 장면엔 전투적 긴장이 흐른다. 이것은 인질이 된 남자들의 뜻 모를 침묵과 이상한 실랑이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백치미의 극치를 보이는 소녀의 시선으로 감지하게 되는 동물적인 예감의 방식이다.

초반부에 등장한 이름 없는 남자는 누군가에게 죽음을 당하고 싶어 하며, 스모차림을 한 채 늘 칼을 차고 있는 한 남자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한다. 후반부에 57살이라고 밝히는 최고령의 남자는 죽고 싶어 하는 남자에게 죽여주겠다면서 총을 내놓지만 총은 늘 고장 나거나 여하튼 기능이 부실할 따름이다. 여기에 총을 찾으면 다 쏴버리겠다며 혈기에 차있는 소년까지 합류해 죽고 죽이는 역할 게임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갑작스럽게 지하철로부터 텔레비전을 고이 상주 모시듯 하여 온 남자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 텔레비전 수상기는 화면도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음성으로 방송을 시작한다. 한 외국인이 무기 탈취극을 벌이고 있다는 사건이 들려온다. 남자들은 흥분에 싸인다. 이들은 이 외국인에 대해 공동의 임무(실은 각각 다른 목적)를 띈 채 이곳을 탈주한다. 적의 실체는 보이지도 않고 방송 수신탑을 통해 자수를 강권하는 경찰의 목소리만 허공에 쩌렁 쩌렁 울려댄다. 이들은 그 와중에 푸른 눈의 외국인을 발견한다. 이 외국인은 총기 하나만을 덜렁 쥔 채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름 없는 남자가 가장 먼저 외국인에게 다가간다. 그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이 남자는 이상하게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어 57살의 최고령 남자가 '아임 유어 프렌드'를 외치며 어색한 웃음으로 악수를 청하고, 소녀는 심지어 바게트 빵을 들고 오더니 외국인에게 먹이기 시작한다. 이들은 갑자기 통성명을 하기 시작한다. 화기애매한 분위기가 급조된다. 그러나 금세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최후를 맞이한다. 특히 아랫도리를 난사당한 57살 남자가 사지를 끌려가는 장면이나 텔레비전을 상주 모신 남자가 외국인을 쏘고 나서 자신도 총에 맞아 사망하는 장면은 꽤 비장하다. 최후에 남은 두 남녀가 드디어 미뤄온 섹스를 카메라를 향해 벌인다. 이것이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이라고 남자가 말한다. 이들의 마지막 근거지는 거대한 무덤 같은 곳이다. 누군가의 무덤에서 찾게 되는 생의 감각, 죽은 자들의 흔적 위에서 벌이는 남녀의 동반 행위라고 하는 감각적인 문제에 대한 죄의식 혹은 수치라는 문제가 떠오른다. 국가적인 과제와 개인적 욕망이라는 이중성을 그대로 딛고 일종의 묘기를 벌이는 듯한 한 편의 기묘한 컬트무비가 아닐 수 없다. 이 영화가 던져놓는 또 하나의 난제는 (<의식>같은 영화에 훨씬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군국주의자와 혁명가, 극우파와 극좌파의 대립 혹은 범죄자와 나르시시즘에 함몰된 극단적 허무주의자들에 대한 연결고리를 탐구하는 일례없는 방식이다. 오시마는 이들을 역사의 수직선상에서 끌어와 횡단의 선상에 놓고 일종의 대결을 붙이는 듯 하다. 재판 과정 같은 성토의 장면들이나 일종의 의식(장례식, 결혼식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대간의 웃지 못 할 촌극의 대결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들릴 진 몰라도 오시마는 군국주의자들의 최후인 범죄라는 문제와 혁명가들이 이끌린 허무주의적 의식을 일침하여 그 사상적 배후를 연결해보는 전복적인 방식을 선보인다. 이 연결은 이 영화에서 '일본의 동반자살설'로 일결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감각의 제국>과 <소년>은 오시마 최대의 신파극이라 불려도 좋을 것이다. 특히 <소년>은 굉장한 인상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영화다. 채 두 세 살이 안 됐을 아기를 눈보라가 이는 평원 한 가운데 앉혀 놓고 시네마스코프만한 크기로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마치 기다리고 있는 듯한 연출 방식을 본다면 오시마 감독은 대단히 무뢰하거나 무서운 감독으로 짐작된다. 실제 있었던 일본의 교통사고 자해 공갈단 가족을 모델로 한 이 영화는 소년의 가짜 눈물과 진짜 눈물이라는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일종의 실험을 벌인다는 면에서 역시 오시마의 역작답다. 초반부 소년은 마을의 비석 앞에서 고향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소년은 혼자 놀이를 벌이고 혼잣말을 중얼대며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일인극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어떻게 벌써부터 생존의 방식을 이렇게 터득하고 있는지는 알 턱이 없으나 그저 가슴이 아린다. 이렇게 동네 어귀에서 혼자 놀고 있는 소년을 보면 오시마의 데뷔작인 <사랑과 희망의 거리>에서의 소년의 여동생이 떠오른다. 정신이 모자란 이 소녀는 죽은 동물들을 친구 삼아 매일 혼자 놀다 훌쩍이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여하튼 이 장면에서 소년은 진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어 소년은 포장마차에서 이상한 차림으로 국수를 먹고 있는 가족들 뒤로 쑤욱 들어와 같이 국수를 먹는다. 이들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먹기만 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이들이 범상치 않은 가족임을 짐작시킨다.

어느 날 엄마와 아이는 차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의 인도에서 따로 떨어져 걷는다. 둘은 마치 야구의 투수와 포수가 사인을 주고받듯 하더니 누군가 한명이 급하게 차도로 몸을 날린다. 나머지 한 명은 다가가 호들갑을 피우고, 이들은 다 같이 병원으로 향한다. 소년은 의사 앞에서 매일같이 고향 노래를 부르며 연습한 눈물 흘리기를 연기하고, 뒤늦게 당도한 아빠는 엄마의 뺨을 올려붙이고, 피해자는 덜덜 떨면서 돈을 내놓는다. 영화는 이 반복적인 패턴을 일본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행하는 가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영화는 계속하여 소년의 시선을 염두한다. 소년은 자신이 범죄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으며 이 가족을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소년의 심리를 훌륭하게 묘사한다. 후처인 어머니에 대한 상대적인 애정도, 상이군사인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동정어린 심경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소년이 처음으로 가출할 결심을 하는 여관방의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다. 잠에서 깬 소년이 문틈사이로 보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 술에 취해 있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도 공허하며 쓸쓸한 표정의 모습을 보며 짐을 싸는 아이의 행동의 성숙함과 비장함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존 포드의 <분노의 포도>에서 헨리 폰다가 집을 나서는 장면에 비할만하다. 소년은 불과 10살이지만 범죄를 위해 중학생 복을 입었기 때문에 결국 고향에 가는 열차표를 사지 못한다. 소년이 바닷가의 끝까지 나가 자갈밭에 신발을 벗고 누워 밤하늘을 보며 고향의 노래를 부른다. 이 장면은 연기를 위한 눈물이 진실이 되고야 마는, 아니 어쩌면 눈물을 연기해야했던 그 순간부터가 실은 진짜 눈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이는 이 외에도 범죄를 벗어나기 위해 일탈을 벌이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이 가족은 소년과 여자의 육체를 매개삼아 범죄를 일삼는 한 남자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참혹하지만 이 전쟁 상이군인인 남자가 사회에 취직할 수가 없어 결국 범죄로 내몰리게 되는 사회상과, 수없이 바뀐 새어머니에 치여 애정을 받지 못한 여자가 어떤 형태로든지 가족을 이루어 정상적으로 살아가고자 애쓰는 상황과, 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립적 상황을 잠재우고 화해시켜 어떻게든 희망의 매개가 되려고 노력하는 소년의 눈물 어린 투쟁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차라리 절절하기까지 하다. 특이 자신을 우주인이라고 말하며 동생인 아기에게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온 고독한 투사인 우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장면은 최고의 신파를 우려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발음도 안 되는 아기가 흰 설원 위에서 추위에 떨며 '안드로메다 서..운' 할 때 우리는 알면서도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년이 죄의식을 본격화하는 것은 오사카에서 의도적이지 않은 한 차량 사고를 목격한 이후이다. 아기 때문에 피하려다 차 사고를 당해 죽게 된 한 소녀의 눈동자를 지켜 본 소년은 타자의 죽음이라는 창을 통해 자신의 범죄성을 자각한다. 이것은 <교사형>에서 R이 박수남과의 편지의 창을 통해 자신의 범죄를 일말 고백하게 된 것과도 상통한다.

이 외에도 오시마 영화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음악과 노래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대의 계급과 정치적 위치, 지역적 정취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노래는 오시마 영화의 도식 같은 것이다. <일본의 밤과 안개>의 혁명가와 <의식>의 군가, <신주쿠의 도둑 일기>의 후텐족 노래, <그 여름날의 누이>에서의 오키나와 전통 가요 등이 그러하다. 그것을 전유한 사람들에게는 향수적인 감정이 있으나 역으로 정치적 변절이나 단절을 겪은 세대에게 그것은 혐오감이나 이질감의 대상이 되어있기도 하다. 노래는 그 노래를 공유한 공동체의 시간과 공간의 상황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아래 세대로 흘러내려 오거나 혹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라져 없어지기도 한다. 미클로슈 얀초의 <대결>같은 영화에서 후배 학생들이 끊임없이 춤을 추며 부르는 혁명가 같은 노래처럼 <일본의 밤과 안개>에서도 그러한 춤과 노래라는 형태로 집단적인 사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선배 세대는 춤추고 노래하는 판을 걷어치울 것을 명한다. 놀이와 혁명이 일시적으로 맞물려가려는 순간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진지한 대결 의식이 각자가 전유한 노래와 맞물리면서 일종의 역설적 코미디가 되는 상황을 <의식>이나 <그 여름날의 누이>등 70년대 초반의 영화에서 오시마는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그 자리에서 불리는 군가나 혁명가 혹은 전통가요는 각자의 상황을 대변하는 듯하지만 이는 공명하지 못한 채 자멸하는 인상을 준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다. 노래는 과거의 의식을 담아 현재에 호명되어, 그 호명의 주체에게 죽음을 명한다. 이상한 주술의 노래. 오시마는 <신주쿠의 도둑 일기>의 오프닝에서 후텐족의 기이한 노래를 들려주며 신주쿠를 죽음이라는 노래의 주술에 걸린 이상한 알리바바의 도시라고 말한다. <그 여름날의 누이>에서 전쟁의 상징 같은 오키나와의 유곽에서 노래를 부르는 소년과 소녀의 도시 풍 가요와 뿌리를 알 수 없는 자식을 앞에 두고 누구의 씨인가를 따지는 어른들의 이상한 의식에서 불려지는 오키나와의 전통 가요의 매치는 일본과 미국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을 오키나와에 마치 주술을 걸어 식민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굿을 치루는 것이 된다. 이 영화 이후 오시마는 ATG와 결별한 채 철저히 국제적 합작의 방식을 따른다. <감각의 제국>, <열정의 제국>,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 등의 영화는 타자와의 관계에 실패한 것으로서의 군국주의를 회유하고 있다. 가장 안쪽으로는 태초의 문제, 즉 남녀의 섹스로부터 근원한 것이며 가장 바깥으로는 서구적인 것에 대한 쇄국과 개양의 문제로, 즉 19세기적 상황에 대한 재고인 것이다. 그의 후기작은 근본적으로 수치감이라는 일본민족의 특성을 바깥으로 투사하여 끄집어 내 몰매를 맞으면서도 국가를 초월한 뭔가를 이뤄내겠다고 다짐한 오시마의 결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끝)

 

 

2010.07.26
김시원(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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