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개봉 당시 많은 이야기거리를 던져주면서 숱한 담론에 휩싸였던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에 대해 두 사람이 글을 보내왔다. 객원필자 양석중 씨와 독자인 홍은화 씨가 그들이다. 당도한 글의 품새로 보아 필시 스터디나 세미나를 경유하여 완성된 결과물일 듯한데, 두 글을 나누는 것 보다 한 눈에 펼치는 게 나을 것이란 생각에 편집자 임의로 합쳤음을 알려드린다. 이미 많이 알려졌고 보여졌으나, 여전히 되새겨 볼 만한 영화이니 독자들의 필독, 정독을 권한다. (편집자)
하나_ <엘리펀트>, 현상(現象)을 현상(現像)하다
실제의 사건, 그것도 시사성이 강한 소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어떤 정치성도 내포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때문에 내게 이 영화의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일라이어스의 필름 현상(現像, develop)’신이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난생처음 필름 현상·인화 과정을 지켜보았다. 특히 일라이어스가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시간, 필름에 약품(?)이 골고루 스며들게 오랫동안 앞뒤로 흔드는 신은 마치, 감독이 영화를 현상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1) 영화를 현상(現像)하기
영화초반, 존의 볼에 다정하게 키스를 해준 아카디아가 참석한 동성애-이성애 모임의 토론주제는 ‘길거리에서 게이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는가?’이다. 이 주제는 토론 과정에서 ‘과연 알아볼 수 있는가?’라는 의구심과 ‘농가에 피해를 주는 게이 양(sheep)을 축출하기 위한 연구’로 흘러 ‘동성애자가 되는 원인을 알아내면, 동성애자를 없앨 수 있는가?’의 문제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내 ‘그러한 문제는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하며, 오늘의 주제는 (단지) 게이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는가?’로 돌아간다. 그리고 영화는 이 시퀀스 이전과 마찬가지로, 총기난사사건의 범인인 에릭과 알렉스를 비롯한 그날 그 사건의 자리에 머물렀던 많은 학생들을 중첩된 공간과 시간 속에 뒤따른다. 이들이 공존했던 공간과 시간에 벌어지는 현상(現象.phenomenon)을 현상(現像, develop)하듯이. 여기서 현상된 영화는 어떤 목적인가? 일라이어스가 등장한 첫 시퀀스. 한 쌍의 커플 사진을 찍는 그.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는 하지만 구체적인 목적과 의도-사진의 컨셉-는 밝혀지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단지 찍고 현상할 뿐. 관객은 그 목적을 알 수가 없다.
2) 현상된 영화의 미학
영화적 현상(現像, develop)은 사진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감독은 영화 매커니즘을 십분 발휘하여, 필름을 약품에 적시듯 꼼꼼하고 유려하게 모티프를 구축한다. 1)에서 아카디아의 토론에 관한 서사가 단절되었다고는 했지만, 신은 네이선과 캐리가 행정실을 나가는 신으로 데쿠파주 되면서 공간과 시간, 사운드(대사와 음악, 음향효과, 내재적/외재적 모두) 어느 지점에서 중첩되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다른 방향의 내러티브에서는 단절이라 할 수 없다. 즉, 카메라 워크 방식은 토론 시퀀스와 마찬가지로 네이선과 캐리를 여전히, 그리고 천천히 트래킹한다(a). 해서 네이선과 캐리가 행정실이 아닌, 토론장을 나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러한 공간 사용의 모티프는 카메라 워크에서 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 속 같은 공간(행정실, 복도, 도서관, 운동장등)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여러 각도-각 인물들의 방향-에서 비추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시간 사용 역시 그러한데, 일예로 ‘존이 행정실에 머무른 시퀀스(직원이 네이선에게 ’몇시에 오지?‘라고 한다)- 존이 울고 있을 때, 아카디아가 존에게 키스하는 시퀀스-아카디아가 토론에 참여하는 시퀀스- 네이선과 캐리가 행정실에서 나오는 시퀀스(직원이 네이선에게 ’몇 시에 오지?‘라고 한다)’의 순서에서 마지막 시퀀스는 존이 행정실에서 네이선과 캐리가 공존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으로 존이 행정실을 나오기 직전의 상태다. 이는 영화구성에서 (모티프인 만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데, 사건이 발생하기 몇 십분 전이 무한 반복 되고 있다는 착각을 일게 할 정도다. (이러한 영화미학 때문에 나는 정성일 평론가의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시간을 사건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윤리적인 결정”(<엘리펀트 Elephant> 시네마틱 공간의 탐색(양석중) 참조)에 공감하는 쪽이다. 물론, 양석중님의 그러한 표현이 ‘정성일식 과장된 표현’이라고 한 것의 초점은 나의 공감과는 다른 부분에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사운드, 특히 음악과 음향의 내러티브.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월광’ - 중첩되는 학교 안·밖의 음(때론 소음 같기도 한), 노이즈 같은 기계음 - 에릭이 자꾸만 틀리게 연주하는 ‘엘리자를 위하여’· ‘월광’ -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엘리자를 위하여’, 노이즈 같은 기계음, 자연의 동물(새?)소리의 중첩 후, ‘엘리자를 위하여’만이 남는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두 곡 모두 베토벤의 곡이다. 이 내러티브에서 학교가 아닌 다른 공간을 사용하는 시퀀스의 주체들, 살인자인 에릭과 알렉스가 머무른 지하공간에서는 불완전하며 미숙한 피아노곡(연주)이 배치된다. 처음 ‘월광’곡에서 (살해될) 미셸이 달리기를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며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듯 찬찬히 훑는 모습과,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머물렀던 공간과 시간과는 대조적이기까지 하다. (심지어 에릭은 연주를 하다가 결국 중단한 뒤 악보에 양손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이 시퀀스 역시 단절되지 않는다. 토론 시퀀스와 같은 카메라 워크, 공간을 회전하는 듯한 트래킹(a')이 그러하며, 언급한 베토벤의 곡들이 중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생존자와, 살해자, 희생자 사이에 모티프의 작은 변형들을 통해, 균열을 일으켜 살해자들의 윤리적 책임을 회피시키지는 않지만, 모티프 원형(pattern)을 통해 그들 모두를 위로하기도 한다.

3) 그렇다면 영화는 왜 현상(現象, phenomenon)을 현상(現像)하려 하는가?
살인자 에릭과 알렉스가 보는 TV속 다큐멘터리에서 또렷하게, 세 번 반복되는 ‘Propaganda' . 히틀러는 매스미디어를 철저하게 선전의 도구로 사용했었다. 마찬가지로 만일, 이 영화가 (현상(現象, phenomenon)을 현상(現像)하는 대신) 만일 어느 누군가에게 무게중심을 실어 진행 하거나 좀 더 사회적·정치적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등장시킨다면, 혹은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일들을 언급한다면 영화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매커니즘의 태생으로 인해 ’선전’이 될 공산이 크다. 이 지점에서 <엘리펀트>(2003)는 ‘콜로바인 총기 난사사건’이라는 실제사건을 다룬다는 소재의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2002년도 <볼링 포 콜롬바인>과 극명하게 엇갈린다. 후자는 영화의 메인 카피가 ‘PROVOCATIVE, INCENDIARY’(국내에선 ‘부시, 부끄러운 줄 아시오’)일 정도로 직설적으로 선전(Propaganda)이 되고 있는 반면, <엘리펀트>는 수많은 현상(現像)들이 정말 특정 현상(現象, phenomenon)에 단 하나의 원인으로 수렴 될 수 있는가? (게이 토론에서 언급한 것과 동일하게) 그 원인을 제거하면 사건은 절대 발발되지 않는가? 라고 묻고 있다.
이렇게 영화에서 나열되는 수많은 현상(現像)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존주의의 기원이기도 한) 실재주의에서의 질료(matter)-가능태(potentiality)를 연상시킨다. 이 질료들은 어떤 형상(form)-현실태(actuality)들로 나타날 수 있는가(결합할 수 있는가)?
왕따(혹은 은따)가 에릭과 알렉스를 살인자로 만들었는가? 그렇다면 미셸도 살인자가 될 가능태인가? 알렉스는 교장을 살해하기에 앞서 ‘그런 식으로 학생들을 대하지마’라고 하는데, 미셸이 왜 긴바지를 입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점수를 깎을 수밖에 없다고 통보하는 교사 역시 살인자를 양성해낼 가능태인가? 살인 게임이나, (불법 혹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가령 부모의 신용카드로 결재했을 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온라인 총기 판매가 살인자를 양성할 수 있는 가능태인가? 음주운전을 서슴지 않는, 지긋지긋한 거짓말들을 내뱉는 아버지를 둔 존 역시 살해자가 될 가능태인가? (이제, 더 이상의 질료는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
영화는 질료들(만)을 나열하면서 (형상, 목적을 배제하면서) 현상(現象, phenomenon)을 현상(現像)하여 ‘선전’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러한 영화 매커니즘의 미학을 작가주의로 완성하는 과정에 포착된 행복(『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최고의 선’이라 일컫는)한 또는 행복할 수 있는 공간·시간, 순간들. 그렇게 <엘리펀트>는 나에게 다큐멘터리보다 더 다큐멘터리적인 동시에 판타지보다 더 판타스틱하게 다가왔다. (홍은화)
둘_ 부재의 재연再演, 그 극점에 대하여
정성일은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을 두고,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시간을 사건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윤리적인 결정"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나는 (과장이 심한) 정성일식 관용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나는 좀 다르게 말하고 싶다. 거스 반 산트의 관심은 죽음에 대한 매혹에 닿아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의 공간과 시간을 재연(을 넘어서 재현의 극점에 도달)하려는 행위에의 매혹. 그러니까 그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한 순간이 상업영화의 단골 소재인 폭력과 섹스가 아닌 오로지 죽음(의 순간)에 있음을 믿는 것 같다. 전작인 <게리 Gerry>(2002)는 죽음이라는 예외적이지만 필연적인 사건에 영화적 정수, 즉 시네마틱한 무엇이 있음을 감지하고 그것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이 영화는 소위 '죽음 3 부작'의 시작이다. 스테디 캠을 이용한 공간의 횡단, 이를 통한 공간의 직조,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의 해체가 이루어지지만, 재구성은 되지 않는다. 애초에 거스 반 산트는 스토리텔링으로서의 내러티브에 관심이 별로 없다. '사막으로 들어간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죽고 한 남자는 살아나온다'는 것이 이 영화의 내러티브의 전부이다.
<엘리펀트>의 시간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겹쳐진다. 시간은 접히고, 구부려지고, 왼쪽이 오른쪽과 연결되고, 아래가 위와 만나면서 시간과 공간을 구축한다. 이것은 일종의 결정화 된, 이미 일어난 실재의 사건을 명징하지만 다시 재현될 수 없는 공동空洞으로 상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중첩되는 방사형의 공간이다.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등 뒤의 카메라의 위치는 관객의 자리이다. 시점 쇼트point of view에 준하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이 위치는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인물에 근접한 시선을 가지도록 유도함으로써 정서적 유대감과 동일시를 이끌어낸다. <엘리펀트>는 표준 렌즈(50mm) 이상의 초점거리가 긴 렌즈로 촬영되었다. 이러한 렌즈의 선택은 카메라가 따라가는 인물을 배경에서 약간 도드라지게 한다. 이때 카메라의 심도, 그러니까 초점focus이 맞는 영역area은 극도로 얇아져서, 렌즈의 초점이 맞추어진 바로 앞의 인물과 배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흐릿한 공간의 덩어리 같은 것으로 남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이동한다. 정확히는, 카메라가 계속해서 이동한다. 일반적으로 이동이 많은 장면들은 카메라의 이동뿐만 아니라 조명의 위치를 고민하게 된다. 이 때 가장 손쉬운 대안은 빛을 받아들이는 양이 많은 밝은 렌즈와 고감도 필름을 선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펀트>는 초점 거리가 긴, 상대적으로 어두운 렌즈를 이용해서 대부분의 장면들을 찍었다. 인물이 밝은 실내에서 어두운 실내로 이동하고 다시 복도에서 건물 사이의 중정으로 이동하면서 화면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급격하게 변화된다. 이 때 중요해지는 것은 등장인물과 배경의 묘사, 연속되는 공간의 지각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그럼으로써 일어나는 인물과 주변의 끊임없는 변화에 있다. 인물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 프레임 속 풍경은, 그러니까 관객이 보고 있는, 관객의 시야는 계속해서 새로운 배경과 인물들로 바뀐다. 사물과 인물들은 장초점 렌즈로 인해 극도로 얇아진 초점 영역layer 안쪽으로 들어왔다 잠시 머물 겨를도 없이 다시 사라져 간다. 이것은 인물들이 각자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망을, 그 무심한 씨줄과 날줄의 얽힘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쌓여가는 얇고 연약한 삶의 결을 묘파하는 이 영화의 시선이다. 사진반의 일라이가 존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사진을 찍는 동안 그 뒤로 특활 시간에 늦은 미셸이 뛰어간다. 이 장면은 세 번 반복된다. 아주 잠시 동안 시간 속에서 공유하는 이 공간을 하나의 장 sphere 이라고 한다면 그들 각자의 방향에서 바라본 시간과 공간은 길게 이어지는 복도 어디쯤에서 슬쩍 얽히고, 다시 풀어진다. 이러한 시간의 반복, 공간의 맺힘과 풀림은 장초점 렌즈를 선택한 이유와 동일한 목적을 갖는다.
<엘리펀트>는 반복되는 시간의 재연을 통해 인물과 인물이 아주 얇게 겹쳐지는 그 순간들을 찾아낸다. 이러한 구성을 편집의 기교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어차피 반복되는 장면들은 다른 방향에서 다시 촬영한 것이다. 카메라는 횡과 종으로 이동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탐색하고 구축한다. 지각한 존이 교무실에서 나가서 빈 교실에서 울다가 여자 아이의 키스를 받고, 일라이를 만나 사진을 찍고, 학교 바깥으로 나가면서 무장한 알렉스와 에릭을 만나기까지의 짧은 시간은 카메라의 이동, 시간의 반복으로 인해 입체적인 부피를 가진다. 이것은 말하자면 시간을 지구본의 지도처럼 펼친 다음, 다시 부분과 부분이 이루는 조합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가상의 공간을 재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한가지, <엘리펀트>는 실제의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죽음 3 부작에 해당하는 작품-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 들이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 작품이 어떤 형태로든 타블로이드적 호기심을 부추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성일과의 대담에서 전찬일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서 일반 관객과 소통하지 못한 영화’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은 정확하다. 이 영화는 사건을 설명하거나 사건의 원인을 밝혀내려 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영화라는 재연再演의 매체가 지닌 자신의 근원적인 한계를 넘어 재현再現의 극점에 도달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다.
<엘리펀트> 후반부의 총격장면은 어떤 사실적인 기록 화면보다도 더 충격적이다. 사람이 사람을 쏘아버린다는 것. 사람이 누군가의 생명을 아무런 미동도 없이 앗아버린다는 행위는, 일반적인 인식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우리는 누구도 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영화도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단서로 보이는 것들이 띄엄띄엄 던져져 있지만, 어떠한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엘리펀트>는 원인을 탐색하지 않는다. 이유도 묻지 않는다. 예를 들어 TV에서 방영되는 나치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많은 오해를 가져왔다. 평자들은 나치의 지식인 탄압과 괴벨스의 프로파간다 전략을 현대 미국에 대한 코멘트로서 어떻게든 읽어낸다. 그러한 독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자막 없이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이러한 이미지가 배음overtone으로서의 노이즈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펀트>는 실재의 사건을 세속의 호기심이 아닌 영화적 논리로 충실히 구축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 중심에는 거대한 동공洞空이 존재한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는 죽음. 다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 죽음이 거기 있었고, 삶 또한 존재했다는 것을 투명한 중재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리얼’한 것이 아닌, 시네마틱 공간의 새로운 구축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부재不在의 문제이다. 이미 일어난 일, 그러나 지나간 일을 어떻게, 왜 재현하는가의 문제.

편집장님 - 편집의 묘미를 십분 살리신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의 폼새가 더 보기 좋습니다.
홍은화씨 - 일라이어스의 현상 장면에서의 그 손 놀림은 '교반' 이라고 합니다. 필름에 새겨진 빛의 강도, 정확히는 빛에 반응한 필름 표면의 은입자들이 그 세기에 따라 덜 떨어지고 더 많이 떨어지고 하는데, 아무리 작은 입자라 하더라도 중량이 있기 때문에 고여서 제대로 상을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막기위해 규칙적인 움직임으로 흔들어주는 것인데요, 실제로 해 보면 그 묘미를 알게 됩니다. 나중에 필름 현상해볼 기회 있으시면 꼭 해보세요.
편집장님/첨언까지 해주시고 감사합니다. 스터디에서 정한 이달의 영화가 <엘리펀트>였던거 맞습니다. ^^
두 글이 합쳐서 올라오니 한 눈에 보기쉽고, 참 독특하네요.게다가 'VS'가 아닌 '두 가지 담론'으로 묶어주신걸 보고는 '역시! 편집장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스터디에서 이 영화의 '시네마틱'한 측면과 아름다운 순간들에 대해선 모두들 공감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별다른 논의를 제시하지 않으려했었죠. 다만, 양석중님이 블로그에 올리신 글중 '내러티브'적인 측면에서 다소 저와 견해차가 있길래 적어보았습니다. story만이 아닌 공간,시간,사운드등(카메라 초점에 대한 상세 내러티브는 아직 역부족이여서요)의 측면에서 읽혀지는 내러티브를. 또 그것들이 어떻게 얽혀지는지를.
모쪼록 감사합니다.
양석중/아- 그걸 '교반'이라고 하는 군요. 그러고보니 <엘리펀트>개봉 당시에 디카의 확산이 가장 크게 이루어진 시기인 것 같아요.(저도 2003년도에 처음 디카 구매를~) 지금은 필름을 보는 것 조차 힘드네요. 사진을 잘 못찍어서그런지 인화,현상에 대한 욕심은 없지만, 만일 해보게 된다면 정말 기분이 묘할 것 같아요. 은근 예술적 감각도 맛보게 될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