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각이 가리키는 필름
(스포일러) 이상하다. 오프닝 시퀀스, 배위에서 대화를 나누는 만화 같은 혹은 합성한 듯한 배경화면이 그렇고, 극이 진행될 때의 과잉 된 사운드가 그렇다. 마치 일부러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려는 듯 혹은 시네마틱 하려는 듯. 뿐만 아니라, 앤드류가 생각에 잠길 때나, 꿈을 꿀 때나, 환각을 볼라치면 그것이 인터컷이든, 신이든, 한 시퀀스 전체건 지나친 이미지의 과잉을 드러낸다. 이것은 단순히 앤드류가 정신질환자라는 복선 혹은 반전에 관한 단서란 말인가? 아니, 오히려 영화는 그럴 때마다, 관객에게 끝임 없이 영화적 몰입을 훼방 놓듯 '이건 영화야, 잊어선 안 돼' 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셔터 아일랜드>는 시종일관 지나칠 정도로 필름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주지시키고 있다. 시네마틱하다는 의미에 보태어 물리적 형태의 필름이라는 사실을.
이미 『모두가 괴물이 되어 죽는다』(정 용) 전문에 나타나 있지만, 재차 몇 가지 언급하면 이렇다. 앤드류의 첫 환각. 아내가 넥타이를 건네주고 어깨에 기댄 후, 배에 부딪히는 파도 신 바로 뒤에 필름 재생의 오류처럼 아내가 어깨에 기댄 장면이 정지화면으로 다시 한 번 나온다. 앤드류의 환각과 관객의 (필름 재생의 오류 기법을 통해) 영화라는 인지를 동격으로 위치시키는 순간이다. 게다가 영화가 진행되면서 아내는 더 이상 별도의 환각, 꿈 신으로 다른 컷에 붙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앤드류의 아내는 당당하게 현실과, 현실의 인물과 같은 공간에 나타난다. 그것도 여러 차례. 때문에 앤드류가 정신질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온전히 반전이라 하기에 무리수가 따른다. 이것은 관객이 편집의 의도적 오류를 알아채어 설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건 분명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커언스 부인의 물 컵 신. 손에 컵이 없이 마시는 척 만 한다. 뿐만 아니라, 일부러 보란 듯 커언스 부인은 물 컵을 받기 전 왼손 소매에 손수건을 꾸역꾸역 삐져나오도록 밀어 넣는다. 오른손으로 물을 마시는 시늉의 신은 이내 손수건이 매달린 ‘왼손’으로 ‘탁’하고 내려놓는 신과 붙는다. 손수건은 왼손과 오른손을 관객이 충분히 구분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러한 속임수(?)가 가능한 까닭은 두 신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찍은 후 데쿠파주 했기 때문이다. 아주 짧은 순간. 관객이 ‘물 컵 손에 없음, 왼손, 오른손 ’등을 나열하지 못하더라도 ‘이상하다’라고 느끼기에는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앤드류의 환각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 앤드류가 보여 준 ‘Run'은 과연 누가 적은 것인가? -. 동시에 ‘필름’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반복적으로 느끼게 하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모티프가 마치 ‘영화적 오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앤드류가 자신의 병을 인정한 뒤의 첫 신. 롱 숏으로 병원 문 앞에 앤드류가 앉아있는 풍경-병원 앞 정원-(1). 다음은 앤드류의 시선으로 본 리버스 앵글의 정원(2). 그리고 (2)에서 카메라는 조금 뒤로 빠져 앤드류의 등 뒤와 정원에 서있는 환자를 함께 잡는다. 앤드류 옆으로 남자 간호사가 지나간다(3). 다시 리버스 앵글로 앤드류의 정면이 보이고 (3)에 없는 여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4). 정확히는 (1)에서 이미 나오고 들어간 남자 간호사와 여 간호사가 각각(3),(4)에 배치된 것이다. 물론 익스트림 롱 숏에 가까운 (1)의 인물들을 관객이 기억할 재간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동선이 다시금 ‘이상하다’고 느끼기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특히(2)번에서 정원에 서있던 여자는 (3)에서 위치· 동작·동선이 확연히 달라-역시 물 컵 신의 손수건처럼 환자의 손에 도구가 들려있다-부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이것은 다시 앤드류의 환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고(앤드류는 시한을 다시 척이라고 부른다), 다시 관객이 ‘필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인 것이다.
지금까지 3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까닭은 ‘셔터 아일랜드’가 ‘극장’으로 치환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아내의 정지화면을 시작으로, 앤드류가 정신병을 택할 때의 편집의 오류기법을 통해 앤드류가 셔터 아일랜드(극장, 영화)로 들어가고 나옴(머무름), 뱃고동과 같은 과잉된 외재음(non-diegetic sound)-배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첼로음(정확하진 않으나, 저음의 악기음)으로 오프닝과 엔딩에서 경적처럼 울린 후 음악으로 이어진다-으로 셔터 아일랜드 즉, 극장 그리고 필름으로 관객을 안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나아가 <셔터 아일랜드>가 전하려는 궁극적 메시지가 진정 서사에 있는가에 대해 의심을 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미 영화 개봉 당시 이곳 네오이마주의 영화필담과 평들을 통해, 그리고 여러 매체들을 통해 이 영화에 대한 (미국의) 역사적, (미국인이라는) 개인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서사로써의 새로운 지점이 없다(정용은 이를 ‘심슨에서 다루지 않은 게 남았나?’라고 표현할 정도다). 게다가 <더 리더>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처럼 홀로 코스트에 대한 역사와 개인사의 관계망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다. 좀 더 확장시켜, 프로이트의 사적 무의식과 융의 집단적 무의식에 초점이 맞는 것도 아니다. 얼핏, 앤드류의 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방어기제로의 환각-세 아이를 죽인 아내를 죽인 자신의 모습-과 집단적 트라우마에 대한 방어기제로의 환각-유태인을 살해한 나치들을 집단 살해하는 자신(과 군인들의 모습)-이 뒤엉킨 내러티브에 몰입 될 수도 있으나, 감독은 그래도 좋고, 그러지 않아도 좋다고 끈임 없이 ‘필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영화에서 차용한 원작의 서사가 감독과 관객 각각의 사적 무의식이라면, 영화의 내러티브는 감독과 관객 모두를 포함한 집단적 무의식처럼 보여 지는 것이다. 전자는 위에 언급한 극중 앤드류의 트라우마이며, 후자는 필름을 만드는, 바라보는 감독과 관객의 트라우마라. 이때 만드는 이가 감독이고 바라보는 이가 관객이라는 일대일 대응 관계는 아니다. 감독역시 관객이 되기도 하고 관객과 다른 감독들(의 반응)도 차기 영화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타자(의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는 무의식이 영화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감독역시 감독이면서 관객이므로.

2. 누구를 위한 쇼인가?
<셔터 아일랜드>를 유희하는 것, 앤드류의 주장이 사실인가 아닌가/ 그의 (사적, 집단적)트라우마는 무엇인가/코리가 말하는 ‘반복’과 환각 속 레이첼이 말하는 50년 뒤란 영화 밖 지금의 역사적 징후를 말하는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같은 관객의 행위(유희).
결국, 앤드류를 위한 쇼, 그 앤드류와 동일시되는 관객을 위한 쇼. 앤드류는 실재의 자신을 망각한 채 ‘셔터 아일랜드’에서 쇼에 참여하고 관객(나/우리)은 현실 속 자신을 망각한 채 ‘필름 <셔터 아일랜드>’라는 공간(극장)에서 쇼에 몰입한다.
코리와 시한은 앤드류의 트라우마를 비물리적 형태로 극복하게끔 병을 치료하려 하고, 코리를 대변한 마틴 스콜세지 세대의 감독들과 시한으로 대변되는 그 차세대 감독들 아니, 국적 불문하고 이 땅의 감독들은 영화라는 사명, 계급과 계급성(이데올로기)/인종적 헤게모니/문화적 성(gender)/도덕과 윤리/철학 등에 대해 관객을 계몽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코리의 대사처럼 그건 무한 루프일 게다. 이 땅에 영화가 존재하는 한.
그런데 문제는 어느 순간 감독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받아들인 것만 같다. 바로 이 지점에서 <셔터 아일랜드>와 영화 <괴물>, 그리고 정성일의 평이 만난다. 관객(앤드류)은 영화 안에서 누구보다 울분하고 고통 속에 영화 속(서사)/ 밖 (서사가 함의한 현실) 모두를 깨닫지만, 각성하지만 영화(쇼)가 끝나면 다시 각성 전으로 돌아가 버릴 거라는 사실을. 앤드류의 각성, 홀로코스트와 암울한 (미국의) 사회적 부조리들을 극장 안에서, 필름 속에서 깨닫게 하는 것은 결국, 허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영화가 차용한 원작의 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아니냐는 관객이 쇼를 어떻게 받아 들이냐의 문제일 것이다.
영화 말미 문제의 편집 오류 신, 각성한 직후의 시퀀스에서 다시 환각으로 가는 신. 시한이 앤드류 옆에 앉는다. 그러나 관객은 더 이상 앤드류의 환각을 오롯이 공유하지 않는다. 아니, 편집 오류를 통해 관객과 앤드류를 일부러 분리시킨다. 영화 속 앤드류가 ‘좋은 사람이 되어 죽어가기’를 택해 스스로 그곳에 남듯. 관객 역시 관객 스스로 마음 속 앤드류(각성한 앤드류, 각성한 나)를 ‘괴물로 살아가야 하는 나’와 분리시켜 영화, 필름('tape') 속으로 다시금 봉인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늘 그랬듯. 'Over and Over'. 시한은 코리에게 고개를 젓는다. 앤드류가 자신의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순간, 관객은 시한과 코리에게 동일시의 무게중심을 옮겨 놓았기에 앤드류와 시한이 바라보는 시선인 카메라 앵글(관객)과 직각이 되도록 몸을 튼 코리의 슬픔을 온전히 공유한다. 그러나 마틴 스콜세지는 슬프지 않다. 그는 이제 막 코리가 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코리를 겪었기 때문이리라.
오히려 그는 관객을 앤드류처럼 상처받은 영혼들이라 생각해 위로하려는 것만 같다. ‘모두가 포기하는 순간에도 함께 해주는’코리처럼. 이는, 비단 앤드류와 같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어디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집단 트라우마, 사적 트라우마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영혼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스스로를 ‘(le politique) 괴물이 되어 살아가는’ 관객을, 환각· 필름 안에서만 ‘Good Man'이 되는 이들을 이제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하여, 시한에게 건넨 앤드류의 대사 ‘What's a next move?'의 move가 movie의 어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들린 건, 나만의 환청이 아닐 것이다.
이제 이 이야기를 알아챈 감독들, 현재의 관객(앤드류)과 호흡하는 당대/차세대 감독들은 스스로를 괴물이라 하는 관객들을 위해 다음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셔터 아일랜드>가 앞으로의 어떤 분기점, 장소(필름)-이런 의미에서 서두에 물리적 의미를 포함한 필름이라 하였다-가 될 수 있을까? 영화대로라면 우리는 50년쯤 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