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마녀의 관]을 주목하는 이유

 


박진성 감독의 장편 데뷔작 <마녀의 관>은 고골의 『VIY』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상상력을 연결지어 그려낸다. 영화 현장과 연극 무대, 그리고 현실 무대의 총 3장으로 이루어진 방식은 마지막 커튼콜 장면에서 연상되듯이 영화를 연극의 막처럼 다뤄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감독은 마녀라는 악과 치명적 매혹성이 양립하는 긴장감에다, 환영성이 더해진 대상을 현실에서 목도하게 되는 한 남자의 두려움이란 감정에 집중한다. 고골의 작품에서 자신이 죽인 마녀를 위해 기도하게 된 신학생이 처한 딜레마를 카메라와 영화 세트장 바깥에 처한 감독의 입장에서,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그리고 제한적인 현실의 장에서 실험한다.

 

주인공 역의 정승길은 몽롱한 눈빛의 영화감독이 되었다가 고뇌에 빠진 신학생이 되고, 마지막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 되는데, 이 동일 인물로 연결되는 흐름 자체가 극적이다. 영화는 한 인물을 분리된 공간상에서 각각 다루면서 기존의 이미지를 중첩시켜간다. 영화 현장에서 현실과 환상의 상태를 오가는 정신 착란증세를 보이는 감독의 내막이 공연장에서 연기되고나서 예술의 현장 바깥에서는 업소를 전전하며 완전히 눈이 멀어버린 채 더 이상 연출과 연기가 불가한 상태로 재현된다. 한편 그의 옆과 뒤에서 그림자처럼, 혹은 업보처럼 늘 붙어다니는 배우 임지영은 마녀가 가진 다양한 상상성을 가지고 있는데 정승길과 매개되기 전에는 매혹적인 젊은 아가씨었다가 그와 매개된 후 끔찍한 마녀가 되어 그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정승길의 눈이 먼 후, 현실의 보이지 않는 수호천사가 되어 그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극 바깥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하여 들려주면서 두려움이란 감정을 체험하고(영화 현장), 그 감정을 재연해보다(연극 공연), 그것과 동반하게 되면서부터 더 이상 죽음과 연결되지 않는 상태(현실의 재현)를 보여준다.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2막의 공연 장면에서 3D를 시도한 점 때문이 아니다. 3막에서 정승길의 피아노 연주와 임지영의 인형극 공연의 장면의 조화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급할만큼 아름다운 것인데, 이 아름다움은 어디서 발생한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1막에서 무척이나 히스테리컬하던 영화 감독 정승길은 여배우에 대한 매혹에 끌려 CG효과로 처리된 영화의 셋트장에서 직접 연기를 하다 그 CG의 가상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는 2막에서 그래픽 처리가 불가한, 오로지 실제의 셋트와 실제 인물간의 연기로만 진행되는 연극에서 고골 원작의 배역을 연기하게 된다. 영화는 여기에서 1장의 경우와는 달리 연극의 현장이 아닌 공연의 실제 상황만을 연출하여 보여준다. 고골의 환상 문학이 연극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질 때, 다시 말해 문학 서사의 구조 그대로를 충실히 따르는 연극을 객석의 관객이 되어 지켜보는 영화의 체험은 화면 바깥 프레임에 대한 현실로부터의 연결성을 차단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연극의 소격 효과와 영화의 어트랙션 이미지가 분리된다. 마녀라는 이중성 즉 그 환영성이 젊은 처녀라는 가시성으로 드러나는 상태에 대한 일종의 매체적 대입이라고도 보여진다. 여기까지의 과정으로 고골의 원본이 매우 입체적으로 보존된다. 그리고 나서 현실의 이야기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카메라는 정승길과 우리가 함께 보았던 마녀를 더 이상 함께 볼 수 없는 상태를 상정한다.

 

이제 두려움과 매혹의 대상이었던 마녀도, 젊은 아가씨도 사라졌다. 대신 물리적이면서 인공적인 '인형'이 들어선다. 말하지도 않고 움직일 수도 없는 인형이 줄에 매달려, 사람의 손에 이끌려 움직이고 음악을 자아내기 시작한다. 3막의 환상의 무대에서 정승길의 피아노 연주에 따라 임지영이 인형을 안고 움직이는 장면은, 마치 장 르누아르의 <나나>, 초기의 무성영화들을 보는 것과 동일한 떨림을 선사한다. 이것은 일종의 가상적 체험인데, 시네마테크에서 오래된 무성영화를 틀었을 때, 마녀를 가둔 관이 열리며 그녀(들)이 풀려져나온다. 그녀는 스크린 바깥의 연주 음악을 따라 마치 스스로 율동을 시작한다. 그녀는 영화의 안내자(임지영)로 인해 활동력을 부여받는다. 부동형의 형태로 공간을 이동하는 인형의 몸에 찬란하게 빛나는 무성영화 속 그녀들의 환영이 씌어진다. 그 찬란함은 화려한 무대 장식 때문이 아니고 CG처리를 위한 푸른 빛의 영화 셋트장 때문도 아니다. 이 순간이 아름다운 것은 문학과 연극으로부터 발생된 영화라는 기술적이고 매체적인 상상력이 실현되는 순간의 탄복에 가깝다. 현실적 두려움으로부터 발생된 텍스트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영화는 더 나아간다. 영화는 마녀의 관에 대한 불순한 상상, 그 죄의식과 딜레마의 프로세스를 보여준다. 관을 열고 다시 닫을 때, 현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열린다.

 

2010.03.06
김시원(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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