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아톰 에고이앙의 [클로이]

 

<클로이>는 평단에서 아톰 에고이앙의 범작 정도로 평가받는 분위기이다. 에고이앙은 미디어의 관음적 시선을 통해 불확실한 인간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스타일에 능통한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엔 '에로틱 서스펜스 스릴러'란 홍보성 문구가 붙어 있는데 에고이앙은 이 문구를 충족시키는 영화를 찍어왔다. 20년이 넘는 영화 연출의 경력에서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것은 스릴러의 장르적인 문법이라기보다는 '스릴러로서의 영화'였다. 에고이앙은 얼핏 매끈한 스릴러 영화를 별 차이 없이 반복적으로 찍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근래 들어 원작을 바탕으로 한 경우도 많고 직접 각색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마치 테크니션으로서 영화를 찍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미디어의 변천사를 영화에 반영해오고 있는데 90년대 작인 <엑조티카>, <어져스터>등에서는 비디오의 관음증을, 2000년 이후엔 그 관음증의 네트워크로서의 웹망을 세상의 축소판처럼 다루기 시작했다(마치 알트만의 경우, 알트만의 수정주의자 폴 토머스 앤더슨처럼 말이다). 미디어는 텔레비전으로부터 웹으로 이르면서 보다 가벼워진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보다 보이지 않고, 보다 즉흥적이고 임시적이며 편재한 이미지로서 예측불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는 영화를 온통 레이어로서 다루는데 즉 스크린, 그 안의 미디어(웹 공간), 그리고 그 안의 현실로 층을 낸 후 각 층의 인물들이 일직선상의 시간에서 상호 작용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각 층에 속한 인물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그들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해간다. 스크린 안의 미디어, 그 미디어 안의 실제란 가정은 의심되기 전까지는 기정된 규칙 혹은 문법처럼 받아들여진다. 영화의 스릴은 이 규칙과 문법을 인물들의 감정이 미세하게 균열시키고 침범하려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이같은 것은 자신의 기원, 어머니를 찾는 여행, 오이디푸스의 신화적 서사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에서 아르메니아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한 아톰 에고이앙의 이중적인 정체성은 그에게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회의를 낳았고, 그 회의는 미디어(웹)의 가상적 재현을 통해 대리충족된다. 시공간상으로 과거에 속하는 고향의, 기원의 이미지를 현재의 동시간성으로 가져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착각(착오)을 낳는다.

 

 



영화에서 캐서린(줄리언 무어)은 남편 데이빗(리암 니슨)의 핸드폰에서 그의 생일 날 비행기를 놓친 시각에 젊은 여성과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이 사진은 비행기를 놓친 시간의 실상이 되면서 남편의 실재의 상에 균열을 일으킨다. 캐서린은 매력적인 젊은 여성의 이미지와 겹쳐있는 가상의 남편의 상을 현실에서 확인하고자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캐서린은 남편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보유한 클로이를 그에게 접근하도록 고용한다. 클로이는 핸드폰을 통해 진행 상황을 알리지만 한편으로는 카페나 호텔로 캐서린을 불러들여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 사회 직업상 클로이는 가족의 바깥에서 기능하는, 주로 유부남을 상대하는 '콜걸'이지만 클로이가 가족의 사적인 내밀한 관계로 불러들여오면서부터 그녀가 캐서린을 '콜'하는 역전의 상황이 발생한다. 캐서린은 잃어버린 남편의 애정의 손길이 닿은, 그 대상이 된 클로이를 만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클로이는 부재하는 어머니의 애정을 캐서린으로부터 대리 충족하고픈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들을 서로를 오인한 채 바이 섹슈얼의 상태를 겪는다.

미디어(핸드폰)로 밝혀지거나 오인되는 현상들에 에고이앙은 흥미를 느낀다. 이 오인은 오이디푸스의 신화와도 직접적 연관이 있는 것으로 뒤늦게 알게된 근친상간의 비밀은 그들을 파멸로 이끌어간다. 에고이앙은 이 미디어의 양자간 소통 구조(마주보는 구조)를 가지고 사회의 체계와 네트워크를 이해한다. 그는 미디어의 폐쇄성과 그것의 허상, 대리되는 현상 등 부정성을 드러내면서 실은 보다 그 미디어의 작동 방식과 현실의 작동 방식이 닮아 있는(가는) 현상에 집중하려 한다. 캐서린은 클로이를 매개물로 하여 부정성의 남편의 실재를 시험하고, 클로이는 그 시험의 가상성에 거짓으로 응답하고(불륜을 가장하고), 관객은 이들이 만들어낸 거짓의 삼각구도에 빠진다.

 

에고이앙의 관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직업과 고전적인 직업과의 공존성, 즉 그들의 긴밀한 네트워크로 확장된다. 예를 들면 부동산 중개인(어져스터), 손해사정인(애모), 콜걸(클로이), 텔레비전 쇼 진행자(스위트 룸)등은 혈연의 망을 벗어나 떠도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교수, 의사, 클래식 음악인 등은 가족을 이루고 사는 인물들의 주요 직업으로 설정되있다. 영화는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인물들이 불순한 의도로 가족에게 접근하여 벌어지는 파국을 주요 서사로 삼으면서도 그 자본주의의 공정성, 손익과 손해를 공정하게 처리해주고 아메리칸 뷰티의 미국식 가족주의의 부정성을 들춰내기도 하며 균열이 생긴 가족망을 매개해주는 역할론을 미디어라는 매체를 통해 시대의 화두로 제시한다.

미디어의 매개성은 에고이앙 영화에서 결론적으로 파괴된다. 영화에서 클로이는 파괴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 지점은 영화의 서사가 아닌, 에고이앙이 영화를 끝내는 클리세 같은 것이다. 인터렉티브한 관찰 즉 미디어의 안과 밖, 가족망의 안과 밖, 전경과 후경의 마주봄 이후에 취하게 되는 에고이앙의 방식은 가상의 배제이다. 영화는 결론적으로 실재만을 남겨놓게 되는데 그 영화의 시간 동안 미디어는 영화 안 혹은 바깥으로 무언가를 툭 던져 놓는다. 에고이앙 영화의 말미에 인물들에게 남겨진 사물들은 언제나 어머니의, 선조의 유품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주인이 없는(사라진) 사물이다. 가상의 매개물(핸드폰 등의) 대신 유품을 손에 쥔 채 묘하게도 깨끗한 느낌을 띄고 있는 인물의 얼굴은 영화 내내 신경증적인 반응을 보이던 히스테리컬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이미지이다. 이것은 무언가 내밀한 것을 고백한 이후의 얼굴처럼 느껴진다. 시기상으로 뒤늦은 것이자 시선상으로는 영화 바깥을 빠져나온 것이다. 이들의 어긋난 가족사가 화해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인간적인 희망이나 소망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 대한 이미지인 것이다. 에고이앙은 현대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자본과 미디어를 가지고 미디어와 자본의 권력 작동 방식을 탐구하고 있는데, 그 시발점과 도착점은 언제나 스스로 상정하듯이 잃어버린 고향, 부서진 이상 공동체이다. 그런면에서 그는, 영화의 완성도 측면에서 동의할 수 없다 해도 폴 토머스 앤더슨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010.03.05
김시원(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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