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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기술] 우리들의 일그러진 ‘병태’

 

[여고괴담] 1편에서 교사가 되어 학교로 돌아온 은영은 학창시절에 자살한 친구 진주가 아직도 학교에 머물고 있음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영적 능력을 지닌 특별한 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3년에 한번씩, 각기 다른 이름으로 졸업앨범에 등장하며, 자신의 존재를 또렷하게 각인시키고 있었다. 물론 은영이 오기 전까지 진주를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게 반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것은 그녀에게 풀지 못한 응어리가 남아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터. 그것은 유령이 되어서도 지울 수 없는 피맺힌 한이었고, 세월이 흘러도 해결될 줄 모르는 학교라는 공간의 부조리였다. 따지고 보면 학교라는 곳은 이 사회의 축소판이나 다름 없으니, 진주를 유령으로 떠돌게 했고, 또 그녀가 그렇게 해서라도 폭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의 문제였을 것이다.

 

현실의 부조리란 어느 개인이 애쓰는 정도로는 쉽사리 개선되지 않는다. 허나 익숙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언제 곪아 터질지 모르는 오래된 상처를 방치할 수만은 없는 일. [여고괴담]의 진주처럼 반복적으로 출몰하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들은 서서히 망각되어 가는 진실들을 끊임 없이 환기시킨다. 기억해내라고, 그리고 잊지 말라고. 진주처럼 원한을 간직한 유령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데자뷰처럼 떠오르는 많은 이들이, 함께 외치고 있다. 언뜻 낯설어 보일지 몰라도 조금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번쯤 마주쳤을지 모를 이들 중에 병태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있다. 이름은 바뀌었어도 그 얼굴 그대로 나타난 진주와 달리 병태는 시대별로 모습을 달리했다. 그러나 한결같이 유지해온 병태라는 이름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강요하는 세상에 적응 못한 이들의 비애를 상징하듯 자리해왔다.

 

1970년대의 병태는 친구의 죽음을 뒤로 하고 입영열차에 올랐다. 그것은 도피였고 죽음, 혹은 순응 이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는 어느 몽상가의 절망에 다름 아니었다. 그에 비한다면 1980년대의 병태는 한결 밝아졌다. 든든한 조력자와 함께 한바탕 휘저으며 다시 한번 세상과 맞붙어볼 여력을 되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상황은 다시 급변한다. 동해 바다에 가서 고래를 잡겠다는 몽상 따윈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하루 무사히 수습하는 게 당면과제인 각박한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어찌되었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병태에겐 꿈을 꾸고, 자신을 되돌아 볼 여유가 있었다. 허나 2000년대의 병태는 다르다. 그는 정말로 하루 하루 지옥 같은 시간을 버텨내야만 한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운운하며 기세 좋던 시절과 상처 입은 이들로 가득한 시절의 차이인 것일까? 모두가 대책 없이 낙관하던 좋은 시절은 온데 간데 없이 또 다시 정글 같은 지옥도가 눈 앞에 펼쳐지고야 만 것이다. 진주가 9년간을 떠돌았어도 학교가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강산이 두 번, 세 번 바뀌었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니 할 말을 하기 위해 오랜 기억 속의 누군가가 소환되어 나올 수 밖에. 그래서 병태다. 우리들의 병태는 그렇게 긴 세월을 돌고 또 돌아 우리 앞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헌데 이번엔 20대 청년이 아니라 10대 소년 병태다. 선배 병태들이 활약하던 작품들과 달리 제목도 다소 살벌하다. [싸움의 기술]이라니.

 

이쯤 해서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에게 종종 들어왔던 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다른 생각하지 말고 기술 배워라. 기술 하나만 배워도 먹고 살수는 있다.” 그야말로 먹고 사는 문제가 다급하던 시절의 구호.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버렸다고 믿었건만, 누군가는 아직도 무수히 쏟아지는 폭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기술을 터득해야만 한다. 보다 원초적인 문제가 좀 더 일찍 찾아온다. 이게 바로 1970년대와 80년대의 병태들이 막연히 그려왔을 2000년대의 실체다. 게다가 병태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 없다. 보호자가 될만한 어머니는 부재해있고 아버지는 공무에 바빠 그를 돌볼 여력이 없다. 학교 교사들은 무책임, 무관심하다.

결국 아쉬운 자가, 살아남기 위해 직접 우물을 팔 수 밖에. 병태의 등장을 시대의 필연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의 짝패가 등장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 터. 물론 지긋한 연배의 판수를 소년 병태의 짝패로 놓기엔 균형이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병태가 가장 탐내는 능력을 지닌 그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병태가 나아갈 수 있는 정점이자 한계를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병태의 옆자리에 놓일 수 있다. 도피를 위해 잠시 군산에 잠적한 판수가 병태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어쩌면 판수는 폭력에 맞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병태에게서 자신의 옛 모습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어찌 보면 서부극의 총잡이 같고, 또 어찌 보면 무협지의 은둔고수 같은 모습의 판수지만 병태와 노닥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형이다. 만약 저런 사람이 내 자식, 또는 내 동생과 함께 어울린다면 만사 제쳐놓고 말리고 싶은 모양새의 판수이지만, 그에겐 다른 어른들에겐 없는 무언가가 있다.

 

 


판수는 이 세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을 병태에게 알려주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그 진실은 바로 싸움엔 룰이 없다는 것이다. 주먹과 고성이 오가지 않더라도, 무한경쟁을 요구하는 이 세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싸움판일 터. 그 아비규환의 한 복판에서 무작정 룰만 강조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아버지도, 기술 익히라는 학교 선생들도 현실의 부조리는 모른 척하며 탁상공론만 하는 무지한 이들에 불과할 따름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기존의 시스템에 안주한 자들이기에 자신과 똑같은 공산품들을 양산해내려 자신들의 낡은 규칙을 반복 주입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근엔 어떤 높으신 어르신네도 취직하려면 기술을 익히라는 망발을 날렸다고 하지 않던가. 영화 속 그 답답한 어르신들이 마냥 허구의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 반면에 판수는 자신이 발 딛고 선 세상의 실체를 통찰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물론 그가 부조리한 세상 자체를 뒤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불러오더라는 필연의 법칙은 전설의 싸움 고수라는 판수 자신도 어쩌지 못한다.

그래도 최소한 그는 위선은 떨지 않는다. 어디 누구 말대로 기술만 익힌다고 만사형통이겠는가. 천만에. 판수는 병태에게 조용히 말한다. "네 안에 가득한 거, 맞아본 자의 두려움. 그걸 깨부숴라" 지극히 교과서적인 가르침일지언정, 기술 익히라는 말 보단 이쪽이 훨씬 더 지혜롭다.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빵부터 날리는 세상의 부조리를 바꿔 놓을 수 없다면 그 앞에서 주눅들지 않는 법이라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어른의 도리일 터. 판수는 자신이 몸으로 부딪히며 익힌 생존의 법칙을 병태에게 하나씩 전수해 나간다. 제도권 바깥에서, 단독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판수는 분명 구시대의 유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약육강식의 정글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병태들에게 필요한 것은 판수가 고수해온 거리의 법칙이라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싸움의 기술]은 어딘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지혜와 통찰력을 갖췄지만 자신만의 룰을 고집하는 나이든 마초와 그의 가르침과 함께 인생의 좌표를 조정해 나가는 젊은이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이 영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만큼의 성찰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싸움의 기술]에는 난관에 맞서 온몸으로 부딪히는 이들이 풍겨내는 묵직한 땀내음이 살아 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 보도록 하자. 학교 싸움짱 빠코가 끌고 온 건달 패거리들에 의해 위기에 빠진 병태를 구하기 위해 판수가 돌아온다. 명불허전의 솜씨로 건달들을 제압하는 판수지만 그도 무사하진 못하다. 야구 배트로 등을 강타당하고 칼까지 맞게 된다. 제 아무리 싸움의 고수라도 등 뒤에서 가해지는 공격까지 피할 재간은 없더라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을 재차 확인시켜주는 순간이랄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무림영웅들이 정중히 대련을 요청하던 강호도 아니고 황야의 건맨들이 점잖게 숫자 열을 세고 동시에 돌아서 방아쇠를 당기던 서부개척시대도 아니다. 아니, 실상은 그 시대들도 등 뒤에서 상대를 치는 경우가 허다하던 야만과 폭력의 시대였을 것이다. 판수는 자신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칼을 뽑아 병태에게 보여준다. 도대체 왜? 뒤늦게 달려온 경찰들이 오해해서 총탄을 발포하기 십상인 지극히 작위적인 상황이다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 칼에 묻은 피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어느 아버지의 피이자 먼 훗날 병태가 흘릴지 모를 피이기도 하다. 기술을 익히고 또 익혀서 고수가 된다 한들 가속되는 폭력의 순환 고리에서 자유로울 도리는 없다는 것. 병태 역시 판수의 가르침을 나침반 삼아 학교의 주먹패들을 하나씩 제압해 냈지만 결국 빠코가 끌고 온 건달들 앞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지 않았던가. 단도에 묻은 판수의 피는 그 냉혹한 게임의 법칙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물증에 다름 아니다. 결국 세상을 안다는 것은 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음을 깨닫는 것일 터. 맞는 만큼 크는 것이라는 판수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곱씹어 볼만하다. 급기야 판수 자신도 병태의 아버지가 쏜 총탄에 쓰러지게 되니, 그는 병태라는 시대의 대표 소심남에게 현실의 부조리를 온 몸 바쳐 폭로해내는 반면교사나 다름 없다.

 

실재하는 권력은 없어도 남다른 지혜를 보여주던 유사 아버지가 성적 올리고 기술이나 익히라던 실권자 아버지의 총탄에 쓰러지고 마는 비통한 현실. 21세기에 재림한 병태의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이토록 냉혹하다. 아니, 그 냉혹함을 보여주기 위해 병태는 다시 돌아왔다. 물론 두려움을 깨부수고, 맞으면서도 버텨내는 것이 해법은 아닐 것이다. 허나 그만큼의 의연함이라도 갖길 바라는 것이 앞서 등장했던 선배 병태들의 염원이라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앞으로 다시 등장할지 모를 또 다른 병태,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갈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2010.02.07
신태균(네오이마주 staf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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