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셋, 어디든 갈 수 있을 때... 우린 어디로 가야할까?
이 영화의 홍보 문구 때문이었다. 시네마테크의 공모전 사태와 맞물려 있는 지금 혼자 개봉관을 찾은 것은. 시네마테크의 문제는 국가와 개인의 충돌과도 같다. 개인이란 시민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시민의 자율적인 삶에 국가가 최소한의 지원(복지)을 보장하는 것이 이행될 수 있다면 그곳은 유토피아일까. 공동체(국가사회)에 소속된 개인(시민)이라면 가장 공동체를 위한 것이 가장 개인을 위한 것일까 혹은 그 역일까. 그러나 국가가 개인을 향해 일정한 권력을 행사할 때 그것은 간단치 않다. 공동체를 이탈하는 것은 그를 배신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개인은 그런 공동체를 배신하면 안되는가. 개인이 공동체의 패턴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때, 시민의 (자율적인) 윤리의 영역을 계속해서 국가의 공권력이 침해할 때 개인은 국가의 규범을 이탈하는 것으로서의 스스로의 규범을 찾아나선다. 그것이 곧 저항이다. <어웨이 위고>는 샘 멘더스가 무게를 덜고 가볍게 일담을 늘어놓는 듯 여유있어 보이지만 실상 무척 예민한 사회 드라마이다. 이는 소박해 보이지만 공동체의 규범에 저항한다.
제도권 바깥으로 몰려난 Y세대. 그들은 단순히 루저를 대변하는 것일까? 귀농과 유기농을, 인도와 요가(혹은 인도의 문화 양식)를, 불임과 입양을 마치 동일시하는 중산층들의 대안적인 웰빙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아직은 실행력이 없는 상태에 불과할까. 샘 멘더스는 미국 중산층의 위악스러운 지점을 아주 매끄럽고 세련된 방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균열시킨다. 무심하게 자극하더니 끝내 발가벗긴다.

서른 셋의 동갑내기 커플이자 뚜렷한 경제적 기반이 없는 버트와 베로나는 버트의 부모에게 은근한 기대를 하고 있었으나 뒷통수를 얻어 맞는다(부모들은 집을 세놓고 머나먼 타국으로 이주해버린다). 이들에게는 정착할 곳이, 인간답게 살아갈 곳이 필요하다. 인맥과 혈연을 총 동원하기로 합의한 채 정처없는 길을 떠난다. 여행지에서 만나게되는 옛 동료, 옛 친구, 자매와 형제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안정적인 가정 속에서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 이것은 때때로 해프닝이나 과장된 코미디처럼 그려지지만 실상 미국 중산층 사회의 단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습고도 혐오스럽다. 이는 바로 현재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에 대한 좀 더 노골적인 예측들을 결코 빗나가지 않는다.
영화에서 베로나(마야 루돌프)의 캐릭터는 영화 전체의 무게감을 견디고 있는 어떤 의지적 산물과도 같다. 영화 내내 그녀는 임신 6개월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불룩한 배를 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몸을 보고는 사랑스럽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몸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 임신한 상태는 영화에서 단순히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영화에서 보는 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감독은 상황의 변화 가운데서 임신 상태의 돌출된 배를 반복적으로 노출시킨다. 이것은 영화의 상황, 그 표현 위의 어떤 불순물처럼 이질감으로 눈에 차 들어온다. 아직 탄생하지 않은 상상의 생명체는 영화가 다루는 현실의 이야기를 과장시키거나 왜곡시키거나 한다. 아니 그보다 좀 더 우리를 안정적인/극단적인 시각으로 내몰기도 한다. 임신했기에 용서되는 것들, 혹은 임신(까지)해서 더 화나는 것들. 희망 혹은 절망, 생명 혹은 죽음, 사랑 혹은 증오, 가정 안 혹은 그 바깥. 베로나의 배는 이들이 겪는 사회적인 위기 상황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대한 가치관을 시험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버트와 베로나의 임시적인 동거 상태, 그러함에도 사랑의 지속성에 대한 기대를 꼭 붙들고 있는 상태를 대변한다. 임신은 이 영화 전체의 메타포처럼 보이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비만이 된 채 정신이 정지한 것 같은 둔해보이는 상태의 아이에게 중산층의 믿음을 끊임없이 주지시키는 어른이 등장한다. 그들은 베로나의 남산만한 배를 보고 'surprise'를 남발하며 기뻐한다. 하지만 베로나만은 고개를 절래 절래 젓는다. 자신이 바라고 찾는 가정도, 가족도, 미래의 희망도 그들의 시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들이 그녀의 배를 보는, 그러한 불순한 상상은 그녀의 믿음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미국 각지와 캐나다의 지역들을 떠돌며 그들만의 이상적인 가정, 정착지를 찾다 결국 정착하게 되는 곳은 베로나의 고향이다. 하지만 이들의 귀향은 회귀가 아니다. 이들의 선택은 폐허화된 곳을 다시 일구는 것, 재생, 재활의 삶과 관련이 있다. 윤택하고도 청결한, 즉 노블과 심플을 택일의 요소가 아닌 이중 소유화하려는 현대 중산층의 보다 은밀한 부르주아식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행동이다. 버트와 베로나는 집도 없이 임신한 동거 커플이라는 위기 사태에서 잘 먹고 잘 살기라는 슬로건 하에 묻혀있는 수많은 교묘한 지배이념의 허울을 벗어나 원래의, 본래의, 본질의, 상식의, 일상의 기억을 따라온 곳에 현재의 짐을 푼다. 정착지의 주변 환경이나 이웃 주민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곳은 결코 외딴 섬이 아니다.
국가 사회가 온갖 이데올로기을 위시한 권력의 행사로 스스로를 유지하려는(존재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자율과 규범으로 스스로를 존재화하는 개인(시민)들이 살아가는 삶들의 총체들을 이어 내려 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희망적인 연대의 삶, 공동체의 삶을 살 가능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생존을 위해 늘 떠나야만 하고, 어딘가로 가야만 하는 삶의 모색의 과정이 로드무비와 결합하게 되는 냉혹한 사회 현실과 함께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힘을 믿으며 현재의 위기를 절망하지 않기에 영화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