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당한 남자는 회사에서 객기를 부리며 사장의 코앞에 망언을 쏟아낸다. “우리는 사람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당장 이 일을 멈춰야 합니다. 더 이상 대신 지껄여대는 일을 멈추고 그들이 직접 말하도록 해야 해요.”(이 남자의 직업은 카드에 ‘I love us' 등의 문구를 새기는 카피라이터다.)
실연남 ‘톰’(<엽기적인 그녀>의 ‘견우’가 생각나는 이름이다. 이름이 캐릭터의 아이덴티티를 함축해 드러낸다면, 이들의 아이덴티티는 ‘일반 남자’이다). 이 남자의 사랑은 얼마 전 끝났다. 사랑이 끝난 후의 느낌과 프로세스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후의 얼떨떨함과 짜증-기억을 원료로 한 시뮬레이션 놀이 혹은 그래프 분석-무엇이든 해서는 안 되는 행동 포기될 때까지 반복-외부 상황에 대한 공격 본능 발동. 여기까지의 단계에 진입하면 불현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이 세상에 사랑이란 것이 존재하긴 하는 건가?
남자들로 하여금 사랑에 대한 로망을 품게 만드는 매력적인 여인 썸머.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진지한 관계에 얽매어 있기에 우린 아직 젊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L.A.)에서 청춘을 만끽하며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톰의 기억에서 채취한 그들의 500일간의 로맨스 조각들. 회사에서 썸머와 만난 톰은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한다. 곧 연애가 시작되고, 운 좋게 사랑도 온다. 썸머는 이별을 통보하고, 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제 그의 기억에서 디지털시계는 첫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최근으로, 그리고 다시 그들의 관계가 발전하거나 혹은 퇴행하는 어떤 지점으로 점프한다. 뒤죽박죽, 무작위 추출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타임머신의 기동은 톰이 그들의 사랑이 어느 지점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원인을 파악하려는 나름의 목적을 근거로 한다. 톰이 지적하듯이, 썸머의 행동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좋아하는 뮤지션에 대한 느낌을 나누고 영화를 보고 키스를 하면서 “진지한 관계는 싫다”고 말하더니, 진지한 관계를 찾아 떠나버린다.

<500일의 썸머>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애니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같이, 로맨틱 코미디가 아직 한 장르로서의 가치가 있었을 때의 장르물을 보고난 후 느꼈던 기분 좋은 여운과 사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한동안 로맨틱 코미디물들은 상상으로 가공된 여성/남성 편력을 늘어놓으면 사람들이 자신을 쿨하게 볼 것이라고 착각하는 멍청이들 같았다. 혹시, 하는 기대를 일으키려다 10분도 못 가 반복된 넋두리를 늘어놓는 노망난 노인들 같았다.
<500일의 썸머>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미덕은, 최소한 사랑에 대해 솔직한 태도-사실 나도 사랑을 잘 모르요-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거나 공식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에리히 프롬의 조심스러운 정의와 서머셋 몸의 시니컬한 문장도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하물며 카드의 상투적 문구가 사랑에 대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사랑은 감정이고, 개념이며, 상상이 되었다가 진리로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은 그저 유행처럼 보이기도 한다.(최근에는 게임이라고 보는 관점이 대세인 것 같다.) 누가 사랑에 대해서 단정할 수 있을 것인가? 조악한 공식을 들이대려고 하면 할수록, 연인의 관계는 피상적으로 맴돌 뿐이다.
첫 눈에 사랑(에 근접한 감정)을 느낀 누군가가 나의 흔치 않은 취향을 알아봐줄 때가 있다. 또는 헤어진 연인을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도 있다. 이것이 운명인가? 부드러운 조명, 낭만적인 음악, 한때 나를 미치게 했던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가 다시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것은 사랑인가?
안타깝게도 상상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는 그 순간에도 우리에게는 상황을 확신할 수 있는 현명함과 행동을 취하기 위한 용기가 부족하다. 톰의 관점과 기억에서만 존재하는 썸머가 그의 해석대로 ‘감정 없는 로봇’이거나 ‘나쁜년’이기 때문에 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톰은 ‘공유’에 약한 남자이다. 그는 첫 눈에 반한 여자에게도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다. 잘 생각해 보라. 복사실에서 첫 키스를 나눈 것도, 빗속을 뚫고 그에게 다가온 것도 썸머이다. 톰은 왜 그녀와 사랑에 빠진 순간의 감정을 그녀에게 말하지 않는가? 그녀의 빈자리가 그의 존재이유를 위협하는 듯한 위기감을 준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더라면? 우리는 썸머의 모든 행동이 톰의 기억에 근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톰의 아픔에 공감하지만, 썸머 또한 누군가에게 오래 중요한 존재로 기억되길 바라는 강박관념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 중 하나가 사랑 가지고 노는 것이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사랑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척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들어주기 힘들다. 하지만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는 현실 지향적 희망을 던져 주는 것으로 로맨스 영화를 끝마치는 것이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 보면서 내내 느낀건데, 감정을 정말 잘 표현해 놓은 것 같아요. 이런 장르의 영화를 보면서 완전히 주인공과 일치해 보기는 처음인 것 같네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나요?
저도 오랜만에 좋은 작품이 나온거 같아요. 이런류의 작품은 그냥 뻔하게 흘러가는데 마크 웹의 아이디어가 돋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성이지만 썸머같은 부류의 인간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썸머가 이해가 되더군요
결국 사랑도 중요하지만 어른의 성장 영화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톰은 썸머를 통해 썸머는 톰을 통해 서로 모르고 있었던 혹은 알지 못했던 자신들의 중요한 무언가를 찾았다고 생각하니까요 ㅎㅎ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많기 때문에 그만큼 다양한 해석도 가능한 것 같아요. 영화에서 남녀의 연애라는 주제가 이렇게 와닿은 적은 참 오랜만인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