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애가 끝나면 세상이 허물어진다. 그 혹은 그녀라는 이름의 세계가 파괴된다. 그래서 곧잘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충격은 그것이 과거가 되고 기억이 되며 마침내 소회가 되는 순간이 오면 한 때의 방황 정도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연애가 이제 막 끝났을 때의 심정을 담은 글이 지금보다 더 많다면, 우리는 연애의 끝에 겪게 될 감정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조금 더 정직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대개의 경우, 연애가 끝난 직후의 글은 음주 상태에서 쓰여 지고, 또한 대개의 경우 그 다음 날 이른 아침 작성자에 의해 삭제되기 때문이다.
연애가 끝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책임 소재를 가르는 일이다. 이러한 과정은 어느 한 쪽이 더 이상 만나기를 거부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과도한 피해망상에 빠지기도 하고, 그에 비견될 만큼 과도한 미안함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내 인생에 이처럼 대단하게 명치끝을 후려쳐 너덜거리게 만들 관계는 다시없을 거라는 비관에 빠진다.
이건 사실 <500일의 썸머>라는 영화에 관한 글이다. 내가 연애의 끝에서 어렵게 살아남아 몸속의 사리를 헤아리고 있을 때 이 영화를 먼저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보았다. <500일의 썸머>는, 흡사 감기가 걸렸을 때 감기약을 먹어야하는 것처럼, 이제 막 연애를 끝낸 모든 이들이 봐야하는 영화다.
영화는 썸머라는 이름의 여자와 사랑에 빠졌던 주인공의 500일을 다루고 있다. 초입부터 감독은 “이 영화는 연애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선언한 이후 뻔뻔스럽게도 줄곧 연애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다다르고 나면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정말 연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관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새로 입사한 썸머를 본 주인공은 그녀에게 완벽히 사로잡힌다. 그리고 어찌하다 결국 사랑을 시작한다. 둘은 행복했다.
그러나 이 관계의 무게감에 대해 그들은 입장이 달랐다. 주인공에게 이 사랑은 운명이다. 썸머에게 이 사랑은 필요다. 일상의 즐거움은 조금씩 사라져간다.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별이 찾아온다.
그 모든 풍경이 시간대별로 나열되지 않고 먼저 일어난 일과 마지막에 일어난 일들이 종횡무진 뒤섞여 아이러니하게 편집돼있다. 장편 극영화 데뷔를 한 감독의 솜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매끈하고 재기발랄하다(영화를 연출한 마크 웹은 얼마 전 샘 레이미를 대신할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감독으로 결정되었다).
운명을 믿고 이별 이후의 두통과 미련에 시달렸던 모든 이들에게 차가운 말을 쏟아내는 이 냉소적인 영화는, 그러나 놀랍게도 비슷한 경험을 한 관객들에게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한 생각을 남긴다. 얕고 달콤한 위로보다 훨씬 더 쓸모 있는 경험치를 선사한다.
당신이 남자든 여자든, 우리는 모두 썸머를 만나본 적이 있다. 그저 운명일 것이라, 사랑이라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피상적으로 행동했던 우리들은 모두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스스로 감정에 충실했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에 충실했던 것이 아니라 소위 연애 관계라고 불리는 갑과 을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뿐이다. 우리는 곧잘 그렇게 어리석은 연애를 한다.
세상에 운명 따윈 없다. 약속된 땅도 계획도 다음 생 같은 것도 기대하지 마라. 덜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기 위해, 결코 도래하지 않을 행복을 빌미로 오늘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정체를 규명해야만 한다. 그것이 연애든, 고용이든, 혈연이든 마찬가지다. 너와 나의 관계가 주는 만족감의 뿌리가 정말 이 관계로부터 오고 있는 것일까. 혹은 단지 세상으로부터 정의 내려진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뿐일까. 역할에 휘둘릴 것인가, 아니면 정말 관계를 할 것인가. 그 쉽지 않은 답을 찾는 것으로 우리는 정말 나아질 수 있다. 끝이 어떠하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북새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