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즈 야스지로는 극단적인 실험가이다. 그러한 면에서 페데리코 펠리니, 자크 타티의 영화적 경향과 비슷하다. 그는 세상의 대비적인 풍경을 대비시키며 충돌의 효과를 노린다. 그것은 펠리니나 타티보다 사소해 보이나 실은 더 광대한 개념을 내포한다. 오즈는 세상의 물리적인 크기보다 그것의 속도에 관심이 있다. 그는 이 물리적인 속도에 정신이 부유하는 상태의 세상을 정확하게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눈 똑바로 뜨고 미소를 듬뿍 머금은 채 태연하게 말한다. 이명세 감독의 말대로 대단히 시니컬하다.
오즈는 전형적인 것, 즉 기계와 인간을 물질과 정신으로 단순 대비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오즈의 영화엔 빠지지 않고 배와 기차가 등장한다. 이는 (바깥에서 지켜볼 때 상대적으로) 느림과 빠름을, 원운동과 직선운동을, 바다와 육지를, 시골과 도시를 각각 상정한다. 오즈는 세상의 속도와 인간의 속도를 비교 대상으로 놓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속도를 제시한 후 인간의 속도를 뒤이어 보여준다. 그가 매 신마다 반드시 시점숏을 보여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늘과 마을, 그리고 그 마을을 통과하거나(기차) 그곳에 도착하는(배) 교통수단, 그리고 나서야 길에 아이들이 뛰어가고, 그리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와 어른들이 등장한다. 반드시 그렇다. 이것은 정적인 것 같지만 실은 대단히 역동적인 시간을 담고 있다. 세상의 원래 속도, 즉 (풍경의) 정지,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낸 기계들의 빠름(기차)과 느림(배), 그리고 그 속의 사람들의 빠름(젊은이)과 느림(노인)을 시간상으로 편집한 것이다. 이는 각각 다른 방향과 구도를 보이고 있어서 시간의 흐름을 더욱 관념적으로 느끼게 한다.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정지된 풍경, 그리고 마을을 무섭게 직선으로 관통하는 기차와 마을로부터 일정거리를 둔 채 원운동을 하고 있는 듯한 배, 골목 길을 일렬로 서서 뛰어가는 아이들과 다다미 방에 일렬로(한 방향으로) 앉아 대화를 나누는 노부부, 그들과 마주 앉았으나 실은 그 노인들의 틈 사이에 각각 끼어 있는 것처럼 일렬 선상으로 보여지는 자식들까지. 이러한 순의 편집은 기계의 속도와 인간의 속도가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세상의 속도(정확히 말하면 오즈 영화 속 속도)를 늦추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의 쇼트와 하나의 시퀀스를 완성하기 위해 오즈는 이같은 구도적인 수고를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이명세 감독은 오즈의 <동경 이야기> 상영 후 '오즈야말로 영원성 속의 현재, 현재성 속의 영원성을 보여준 작가였다'며 이를 자신의 새로운 영화에서 시도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세 감독이 말한 시간의 개념은 이 영화에서 앞서도 언급했듯이 (자연으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시간, (기계로부터) 배와 기차의 시간, (사람으로부터) 노인과 젊은이의 일상으로 보여진다.
노부부는 배가 떠다니는 항구 마을로부터 기차를 타고 동경에 도착한다. 그러나 동경의 자식들을 바쁜 일과로 인해 노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 그들은 노부모를 온천으로 여행 보낸다. 노부부는 바닷물을 끌어들인 온천에 왔지만 그곳은 정작 사람들로 붐벼 정신이 없다. 이들은 바닷가 앞에 나와서야 안정을 회복한다. 노부부의 시간이 바다의 시간이라면 자식들의 시간은 육지의 시간이다. 노부부는 육지로부터 떨어진 배를 동경하듯이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죽음을 예감하는 것일까. 그들에겐 육지에서의 삶의 행위가 거의 지워져있다. 땅에서는 늘 가방을 챙기고 온화한 미소로 몇마디를 나누는 것이 전부이다. 반면 자식들은 경제활동을 통해 삶을 누리거나 소비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항구로부터 육지로, 시골로부터 도시로 이동해온다. 바다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대비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바다는 육지를 품고 있다. 바다는 잉태한 자식처럼 육지를 감싸 안고 있다. 이것은 이명세 감독이 언급한 '영원성 속의 현재'에 대한 그림이다.
영화에서 이를 감지하고 있는, 그러므로 '현재 속의 영원성'의 개념을 이어갈 수 있는 존재는 '노리코'이다. 이 노리코의 시간이야말로 오즈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핵심일 것이다. 그녀는 노부부의 죽은 아들의 며느리로서 동경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홀로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죽은 남편의 풍경화 속에서 현재를 살아간다. 그녀는 죽은 사진, 죽은 시간들에 둘러싸여 일상을 살아간다. 시어머니가 바다로 나간 후(죽음을 맞이한 후) 그녀가 빠르게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시어머니의 유품인 시계를 꺼내 보며 미소를 지을 때, 노리코는 현재 속의 영원한 것의 가치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현재를 통과하는, 지금 진행중인, 빠르게 변화하는 물질의 세상에 탑승하였음에도 유지될 수 있는, 이어질 수 있는, 혹은 그래야만 하는 인간의 정신의 영역, 그 착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견디는 것, 지키는 것을 전달한다. 오즈는 이것을 과거의 죽음에 대한 집착, 혹은 기념비적인 태도로만 이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통과하는 한 가운데에서만 건져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즈는 정적인 세상의 역설적 위협, 혹은 죽음으로 이르려는 정지 본능,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회귀 본능 속에서 이를 거스르는 속도로 살아가려는 젊은이들에게 직설하지 않고 회유하듯 그의 이같은 가치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회유는 그의 인간에 대한 결벽증적 방식일 뿐 그의 메세지가 아니다. 그의 결벽증은 오히려 젊은이들에 대한, 자식세대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라 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2.
이명세 감독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형식적으로 보다 스펙터클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는 늘 현실을 담아내면서도 몽상가라는 별칭을 얻어 왔다. 그는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 여겼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그는 땅에 발을 붙이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인물들이 꿈 속을 헤매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영화엔 늘 동시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배우들도 당대 최고의 스타를 기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영화 제작에 있어 시스템의 바깥, 저예산, 비전문배우의 기용 같은 것은 허용하지 않아 왔다. 그는 영화를 예술이라 주저없이 말한다. 따라서 그 예술에 막대한 예산이 드는 것을 괘념치 않았으며 그것은 어떤 예술보다 대우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던 쪽일 것이다. 그의 영화는 표면적으로 거대했고 막대한 홍보 비용을 들이는 듯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데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이같은 현상을 볼 때면 그가 산업적인 영역에서의 흥행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흥행성 너머의 예술성, 그러니까 위대한 실패작 같은 것에 대한 이상한 동경같은 것 마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영화판에 있으면서도 그 영화판 너머의 것, 산업적인 영화를 뒤집을만한 예술적인 영화의 승리, 그 불가능한 이상을 계속해서 실현하고 싶은 욕망, 실패할 수밖에 없는 영화를 계속해서 찍으며 언젠가는 대중이 알아줄 것이라는 환상 속에 스스로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명세 감독은 친구들 영화제에서 거의 형식적 스펙터클을 보여준 영화들, 구로사와나 펠리니의 영화를 주로 선택하여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드디어) 오즈의 영화를 선택했다. 개봉 당시 대중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첫사랑>을 현재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 이 역시 큰 지지를 받지는 못했던 이후의 일이다. 그의 영화엔 늘 젊은이들이 나오고 동시대적인 풍경이 떠다니고 게다가 최신의(앞서가는) 스타일과 기술이 등장한다. 그는 영화에서 현재성이라는 것을 충분히, 과도할 정도로 노출한다.
그는 젊은이들의 구미에 맞게 최선을 다하지만 거꾸로 젊은이들은 그것에 선뜻 자신을 투영하지 못한다. 빛나는 외모의 그들이 결국 오래된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순수한 첫사랑의 감정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 대비적인 시대성에 혼란을 느낀다. 지금에 와 김혜수와 송영창의 첫사랑을 보는 것과 강동원과 이연희이 교복입은 모습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정서를 불러온다. 오히려 전자보다 후자가 전형적이어서 촌스럽다고 말한다면 비약일까. 이명세의 말대로 노인이 되어서야 젊은 시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동의할 수 있는 것일까.
오즈만큼 젊은이들을 각별하게 다루어 온 감독은 드물다. 그는 젊은이들의 위치를 노인세대를 이어가는 순차적인 방식이 아닌 그 사이에 끼어있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노인들은 오른 쪽 저편을 보고 있고 젊은이들은 정면을 보고 있다. 그들의 시선은 180도 아니면 90도의 각을 이룬다. 그들은 대화하지만 대화는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이 다른 방향을 상정하고 있다. 동시대의 시간과 과거로부터 이어온 감정이 녹아있는 시간의 운동을 각각 다르게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즈와 이명세의 결정적 차이처럼 보인다. 동시대는 스스로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것을, 시대의 어른들을, 그 사람들을 보고 있고 따라서 그 사이에 위치해 있다. 동시대는 최신 기기를 구사하면서 그것에 어떤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바깥에, 그 소프트웨어적인 것에 있을 가치와 감성을 찾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현재 체내화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들 자신에게는 아직 없는, 그러나 알고 싶은, 동경하고 싶은, 무의식의 대상일 것이다. 이명세 영화의 감성이 우리에게 일부로서만 통과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어른다운 어른이 부재하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반영하는 것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냉소적인 말이 아니다. 이명세는 영화 어른이고, 그는 젊은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감성을 지켜내려는 감독이며, 그 같은 순수했던 예술가들을 자신의 교주로 꼽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유일무이한 감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