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절름발이 언어와 말 못하는 육체

 

[더 리더] 육체와 언어를 통한 영화 '읽기'

 

책을 읽는다. 흘러가는 글자를 따라 눈동자만 굴리는 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입을 벌려 단어 하나하나를 소리 내어 읽는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목소리에 점차 감정이 실린다. 불같이 화를 내던 음성은 어느새 사랑을 속삭이고 구슬피 눈물을 떨어뜨리던 목소리로 다시 생의 환희를 노래한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의 마이클(데이비드 크로스)은 그렇게 책을 읽는다. 한나(케이트 윈슬렛)를 위해서. 자신의 목소리에 따라 울고 웃는 한나를 위해서.

마이클이 읽고 한나는 듣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섹스. 1958년 베를린의 좁은 아파트, 낡은 침대 위에서 열다섯 살 소년과 서른여섯의 여인 한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 책과 섹스, 언어와 육체가 동시에 불타오르는 일체감. 그 뒤로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그때와 같은 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잃어버린 언어, 잃어버린 육체를 찾아 헤매는 상실감에 허덕여야 했다. 어쩌면 그것은 마이클과 한나 혹은 나치즘의 광풍을 지나온 독일 전후 세대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 리더>는 절름발이 언어와 말 못 하는 육체를 가진 현대인, 상대를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는데 번번이 실패하는 우리 시대 모든 현대인을 위한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그렇게 ‘읽고’ 싶다.



육체적 인간, 한나

간염의 신열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이클. 그 순간 한나가 나타나 그를 돕는다. 말없이 마이클이 쏟아놓은 토사물을 치우고 집에 데려다준다. 몇 개월 후 병상에서 일어난 마이클이 한나를 찾아온다. 한나의 육체를 훔쳐본 마이클. 한나의 아름다운 육체는 마이클을 사로잡는다. 첫 만남에서부터 한나는 ‘육체적으로’ 마이클을 돌본다. 아픈 육체를 가진 마이클을 돕는 것부터가 그렇다. 결국 한나는 그에게 섹스를 가르친다. 마이클은 한나로부터 육체의 언어를 배운다.

아픈 마이클을 도와준 것을 보면 한나는 분명 동정심 많은 여자다. 그렇다고 해서 선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한나는 ‘육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체’란 선과 악의 도덕적 기준으로 쉽게 구분 지을 수 없는 인간 본질을 가리킨다. 태초의 생명체로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욕망이 한나의 육체 속에 숨 쉬고 있다. 한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마이클을 돕는 한편 마이클의 성적인 관심을 눈치 챘으면서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의 옷을 벗긴다. 한나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아니,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한나의 행동이 과연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한나는 인간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선과 악의 흑백 논리를 뛰어넘는 탈도덕적 존재다.


그것은 한나가 문맹이라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한나는 언어 이전의 인간이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대자연의 푸른 초원을 벗어나 도덕과 법과 문명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언어로 도배된 문명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나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치명적인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정글 속에서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인간이 문명사회의 동물원 원숭이 취급을 받았듯 한나 역시 문맹이라는 사실을 들키는 날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읽는다는 것, 육체와 언어가 하나 되는 순간

그래서 한나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숨긴 채 마이클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마이클은 한나를 위해 책을 읽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부터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까지 열심히 읽고 또 읽는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처지, 분위기에 따라 목소리에 감정을 실어 책을 읽는 마이클은 한나 앞에서 한 명의 배우가 된다. 마이클을 통해 마침내 종이 위의 언어(글자)가 육체의 언어(목소리)로 바뀌고 그의 연기가 한나를 감동시킨다. 한나는 마이클보다도 더 크게 울고 웃는다.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마이클의 목소리를, 연기를, 그 언어를 받아들이는 까닭이다. 육체와 언어가 소통하는 완전한 순간, 한나와 마이클은 그 완벽한 순간의 희열을 맛본다.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이에 적힌 글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글자의 문을 열어 행간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행위이자 ‘언어’ 아래 잠든 ‘육체’를 발견하는 행위다. 마이클의 학교 수업 장면에서 서구 문학의 역사가 ‘숨겨진 것을 찾는 과정’이라고 설명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 리더>가 한나와 마이클의 만남을 보여주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영화는 두 사람이 옷을 벗고 한 침대에 눕기까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효과적인 편집에 힘입어 결정적인 몇 개의 장면 속에 수많은 감정을 담아낸다. 옷을 갈아입을 테니 마이클에게 문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한 한나는 그러나 자신을 훔쳐보는 마이클의 눈동자를 맞닥뜨렸을 때 썩 놀라지 않는다. 다시 찾아온 마이클에게 한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석탄을 담아오라고 시킨다. 탄가루를 뒤집어쓴 마이클과 무뚝뚝한 말투로 목욕을 권하는 한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더 리더>의 카메라는 정적 속에 흐르는 격정적인 감정의 기류를 더없이 감각적으로 포착해낸다. 금방이라도 현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울리는 바이올린 선율만큼이나 매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마이클네 집의 식탁 풍경을 간단히 묘사하는 것만으로 사랑에 눈뜬 마이클의 흥분과 마이클의 가족 관계를 암시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언어의 공간, 법정

얼마 가지 않아 직장에서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들킬 위험에 처한 한나는 마이클과의 다툰 이후 돌연 자취를 감춘다. 마이클을 떠나기 전 한나는 마지막으로 마이클의 몸을 깨끗이 닦아준다. 마치 마이클의 육체에 남은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이. 지극히 한나다운 이별 의식인 셈이다. 갑작스럽게 한나를 잃은 마이클은 커다란 상실감에 빠진다.

한나의 ‘육체’를 상실한 마이클은 점차 ‘언어’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몇 년 뒤 마이클은 법대에 진학한다. 법정은 지극히 ‘언어적인’ 장소다. 언어로 법과 도덕을 논하는 곳이다. 선 아니면 악, 합법 아니면 위법이 있을 뿐이다. 그 언어의 공간에서 마이클의 눈앞에 다시 한나가 등장한다. 8년 전, 마이클을 떠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했던 한나는 종전 후 학살의 책임을 묻는 재판에 피고인의 한명으로 기소되었던 것이다.

법대생 마이클은 언어의 흑백논리 앞에 한나가 죄인으로 판명되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지켜본다. ‘육체적’ 인간 한나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언어’를 이용할 줄 모른다. 심지어 문맹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뒤집어쓰는 쪽을 택하고 만다. 그 순간 마이클은 불현듯 한나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늘 자신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여자. 지난 8년간 마이클은 한나를, 그 육체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그러나 마이클은 선뜻 한나를 돕기 위해 나서지 못한다.

언어의 논리가 한나에게 달려가려는 마이클의 발목을 잡아당긴다. 글을 모른다고 해서 한나가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한나는 강제수용소의 감시원으로서 사형당할 유태인을 색출하는 작업에 참여했고 300명가량의 유태인들이 잠을 자고 있던 교회가 불타는데도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교회 문을 잠그는 결정을 내리는데 동의했다. 그 모든 사실이 대참사 속에 살아남은 유태인 여인 일라나(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레나 올린)의 책 속에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법정에서 한나는 말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었다고. 계속해서 들어오는 새로운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기존의 수용 인원 중에 사형당할 사람을 선별하고, 유태인들이 교회 문을 열고 도망치려는 것을 막는 것이 감시원의 역할이었다고. 한나는 그것에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 따질 줄 모른다. 한나는 도리어 판사에게 묻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어요?”

증언대에 오른 일라나가 한나에 대해 이야기한다. “처음에 우리는 이 감시원은 다른 감시원들보다 감성적이고 인간적이고 동정심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종 약하고 아픈 수용자들을 데려다가 돌봐주는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리고 나서 그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그게 동정심이 많은 것입니까?”

법정은 한나의 물음과 일라나의 물음에 쉽게 답하지 못한다. 오히려 다른 피고인들, 더 나아가 독일 사회 전체와 한마음이 되어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한나에게 자기들의 죄를 덮어씌우기 바쁘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마이클은 혼란에 빠진다. 그 역시 유태인 학살에 대해 민족적 죄의식을 가진 독일인이다. 또 그는 법학도로서 한나에게 사회적 책임을 전가하는 법정의 부도덕 앞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하면 가중 처벌을 면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이클의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한나가 누군가,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리움의 대상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나가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도덕을 모르는 언어 이전의 인간이다.



육체와 언어의 중간자, 마이클

한나를 찾아간 마이클은 그러나 끝내 발길을 돌리고 입을 다문다. 육체의 부도덕성을 목격한 동시에 정의를 부르짖는 법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깨달은 마이클. 이제 그는 육체와 언어의 중간자로 영원히 어느 한쪽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잃어버린 육체를, 잃어버린 언어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더 이상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된 마이클은 결혼에 실패하고 그 어떤 상대와의 섹스로도 한나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한다. 변호사가 되었지만 법정에 선 그의 모습은 어쩐지 무기력하기만 하다.

이혼 후 혼자가 된 마이클(랄프 파인즈)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중에 있는 한나에게 책을 낭독해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보낸다.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던 한나에게 비로소 작은 소통의 창구가 열린 것이다. 한나는 마이클의 목소리를 통해 글을 천천히 깨우쳐 나간다. 한나는 서툰 글씨로 마이클에게 편지를 써줄 것을 부탁하지만 마이클은 계속해서 테이프를 보낼 뿐 답장을 하지 않는다. 마이클은 여전히 한나를 그리워하지만 열다섯 살 때처럼 쉽게 한나의 편에 설 수도 없다. 그러기엔 언어적 죄책감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1990년, 한나의 가석방이 결정되고 마이클은 32년 만에 한나와 마주한다. 출소를 며칠 앞둔 한나를 찾아간 마이클. 그가 묻는다. “그동안 뭘 깨달았어요?” 한나가 대답한다. “내 생각은 중요한 게 아냐. 내 감정도 중요하지 않아. 죽은 사람들은 여전히 죽은 사람이야.” 이제 한나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가 선과 악을 초월한 육체적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사실 앞에 마이클은 쉽게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다. 어색해하는 마이클의 모습을 본 한나는 목을 매 자살한다.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버린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육체적 인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이클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한나는 마이클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남긴다. 한나는 유서에서 그것을 마이클의 딸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한나의 마지막 언어는 여전히 마이클의 혈연, 즉 육체적 관계를 향해 있다. 마이클은 그 돈을 가지고 일라나를 찾아간다. 한나가 그 돈을 일라나에게 전하라고 했다고 말하면서 한나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일라나는 그 말에 쉽게 감동하거나 한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일라나의 상처는 한나 개인의 속죄로 치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나와 마이클을 포함한 인간 사회 전체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딸과 함께 한나의 묘지를 찾는다. 그는 그곳에서 딸에게 처음으로 한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뒤늦게나마 한나에 대한 죄책감과 유태인에 대한 죄의식을 씻고 딸과 가까워진 마이클은 과연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열다섯 살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일체감을 경험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육체와 언어의 중간자로서 거쳐 온 고독과 방황의 나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마이클은 쉽게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다. 마이클의 불행은 마이클 개인 혹은 독일 전후 세대만의 것이 아니다. 마이클은 대자연의 낙원에서 빠져나와 언어로 문명사회의 탑을 쌓은 현대인, 우리 모두의 초상이다. 현대인은 대자연의 육체를 잃어버렸다. 육체를 잃은 인간에게 아늑한 요새가 되어줄 것 같던 언어는 그러나 생각만큼 그렇게 튼튼하고 견고하지 않았다.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인간은 고립되고, 소통은 방해받는다. 의사불통(意思不通)의 현대인. 말 못하는 육체와 절름발이 언어를 가진 인간은 영원히 마이클처럼 육체와 언어의 중간자로서 헤어날 수 없는 상실감에 몸부림쳐야 할 것이다. 누가 그의 쓸쓸한 표정 아래 감춰진 외로움과 고통을 온전히 ‘읽어줄’ 것인가.

이번만큼은 글로 독자를 만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 없이 적적하게 느껴진다. 한 줄의 글이 되기보다 독자의 귓전에 울리는 뜨거운 목소리가 되고 싶다. 마이클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던 그 순간처럼.

 

2010.01.26
장성란(월간 스크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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