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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차 세미나] Love AND Marriage?; 'AND'에 관한 네 가지 단상

 

지난 해 12월 26일, 제 12차 세미나가 열렸다. 박정숙 씨의 발제로 진행된 세미나는 '사랑과 결혼'에 대하여 참석자들의 자발적 참여와 토론을 유도해 흥미로움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별도의 토론문 없이 현장 토론으로 진행된 세미나였기에 참석자의 발언을 일일이 옮기지 못하는 대신, 발제문의 전문을 싣는다(발제문 원본에는 주석이 많이 달려 있으나, 주석표기에 어려움이 있어 표기하지 못하는 점 양해바란다). 

 

 

Love AND Marriage?
- 'AND'에 관한 네 가지 단상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보다가...

어찌되었든 문제를 내던져 놓고 추이를 살펴보자는 무심한 맘이 앞섰다. 다 늦게 발제글을 시작하려니 잘된 질문이 논의를 만들어내는 것임이 생각났고 어렸을 적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이리 성급한 행동을 하는가하는 반성에 또 시간이 흘렀다. 일단 이번 발제는 나에게 너무나 큰, 전 인류의 주제, 내 생이 허락한다면 아직 인생의 절반도 살아보지 않은 초보자로서 잘 알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잘 알지 못할 것 같은 ‘사랑’에 대한 이유 없는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사랑과 결혼의 ‘관계’에 대한 의문 및 외도에 대한 일종의 항변과 같은 어조가 꽤 녹아있는 이유로 혹시 나를 바람기 가득한 인물로 볼 뭇 시선으로부터 방어하기위해, 나의 관심은 ‘사랑’의 긍정적 기능(삶의 환희, 지독히도 자아중심적 인물의 뜻밖의 이타심등의 기회가 되는)에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리고 결혼 제도가 사랑을 속박(독점적, 이기적 관계로의 퇴행)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통해 ‘사랑’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결혼 제도가 사랑을 속박하고 있음의 근거로 일부일처제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외도, 바람피기를 들어 결혼제도가 사랑에 근거한 형식이라는 믿음이 환상일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잠정적으로 사랑을 위한 (일반화된)형식은 불가능하거나 새로운 탐구 대상임을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이 부분은 열린 결론이 될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연속적으로 본 두 편의 영화 <결혼은 미친짓이다> 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Between Love and Hate)>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결혼관은 광범위한 ‘사랑’이라는 주제에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는 일종의 결혼관이 그것이다. 우리는 종종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는 인생 선배들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에 별 뜻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긍정하는데 사실 아빠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걸 알면 엄마는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현실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애는 사랑하는 사람과 하더라도 결혼은 현실이기 때문에 사랑만으로는...’(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는 시대에 살면서도 결혼정보회사가 판을 치는 이유가 아닐까?) 이때, 우리는 연애, 사랑, 결혼, 현실 등의 개념들을 사용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성립한다. 연애는 사랑을 전제로 하고, 결혼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건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결혼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물음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한다. 우선 진화심리학자 헬렌 피셔의 『왜 사람은 바람을 피우고 싶어할까?』에 의거해 사랑과 결혼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관점을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위의 두 영화가 보여주는 결혼관을 잘 보여주며,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일정정도의 답을 제시한다.

사랑: 성애를 하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한정(동성애, 이성애 포함 형제, 부모애 제외)
외도: 성매매를 제외함 즉, 육체적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닌 감정적 요인을 포함한 것으로 봄

 

 

1.사랑하니까 결혼한다.
: 결혼은 사랑을 전제한다.

그녀/그를 사랑하니까 결혼하고 싶으십니까? 혹은 결혼 하셨습니까?


2.사랑하니까 결혼한다?
: 흔들리는 사랑과 결혼의 관계

지금부터 저는 사랑하니까 결혼한다는 믿음에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가.생존전략으로서 결혼

진화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다음과 같다.p.206
도취와 애착이라는 사랑의 광기가 인간에게서 발달하게 된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원시인에게 있어 상대 성과 관련된 두 가지 측면은 종의 생존을 위해서 중요했다. 첫 번째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게 충분한 시간 동안 끌리게 하여, 성관계를 맺고 2세를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남성이 여성에게 강한 애착을 갖도록 하여, 여성이 아이를 기르는 동안 곁에 머물며 함께 도와 음식을 구하고, 보금자리를 찾고, 약탈자를 물리치며, 아이에게 특정한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혼이란 여기에서 말하는 두 번째 단계에 속한다. 진화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결혼은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필요에 의한 결속행위이다. 이러한 의견에 따른다면 우리는 사랑하니까(그것이 고귀한 감정의 소산이 아닌 동물적 욕구의 소산이라 하더라도) 결혼하는 것이다.

 



 

나.영화 두 편의 이야기- 타산적 결혼, 조건중심의 결혼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사랑하기에 결혼한다고? 그래, 우리가 정말 아무런 타산없이 결혼한다면, 진실로 그러하다면 적어도 이 시대 이런 행동에 적절한 다른 변명을 찾아내야 한다. 사랑하기에 결혼한다는 입장을 고집할 경우, 전통적인 사랑의 정의는 아무 쓸모가 없다. 사랑의 정의에 관해 살펴보자.


“사랑의 진수는 자기 자신의 의식을 포기함으로써, 상대방의 자아 속에 몰입하여 자신을 잊는 데 있다. 이렇게 자기를 버리고 망각할 때에 비로소 자신을 찾는 것이다.” - 헤겔


“사랑이란 의사 소통의 코드로서, 이러한 코드의 규칙에 따라 느낌이 생겨나고, 그것을 표현하고 흉내내고 상대에게 복종하고 부정도 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아울러 그러한 결과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 니클라스 루만
이러할진대, 과연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결혼하는 한 쌍을 보며)이들을 과연,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계약을 하며 조심스레 ‘안전한 관리’를 하는 쪽으로 자신들의 일을 사법 기관에 위탁시켰다. 혼례를 통해 이들은 신 앞에서 그리고 하객들 앞에서 상호간의 불신임안에 서명을 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충실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는가?] 라며, 형식적 결혼제도를 비판한다.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사랑처럼 약하고 비이성적인 것을 바탕으로 배우자를 선택하고, 성욕과 친밀한 관계에 대한 욕구와 이타적인 욕구를 모두 결혼에 쏟아부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떠올리지도 않았다. 사실 많은 역사가,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은 낭만적인 사랑이 최근에 서구에서 발명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사람들은 항상 사랑에 빠졌으며, 어느 시대에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를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이유로 여겨진 경우는 몹시 드물다. 많은 문화권에서 사랑을 결혼의 바람직한 결과로 보지만, 결혼을 해야 할 이유로 보지는 않는다.

18세기에 시장경제가 전파되고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가내수공업의 사장과 직원 같았던 남편과 아내의 이미지도 점차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남편이 가정경제의 동력으로서 밖에서 전적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 된 반면 아내는 안에서 감정적, 도덕적으로 가정에 기여하는 감정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혁명적인 결혼 시스템은 처음 잉태되던 순간부터 불안정한 징후를 드러냈다.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어야 하며 동반자 관계가 결혼의 기본적인 목표라는 주장이 처음 제기되자마자 당대의 논평가들은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만족감을 증가시킨 바로 그 가치관이 결혼 제도의 안전성을 해치는 경향을 내재적으로 품고 있다고 경고했다. 결혼을 그토록 독특하고 소중한 인간관계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는 바로 그 특징들이 결혼을 선택적이고 약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새로운 결혼관을 수상쩍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사랑의 결합이 지닌 위험성을 걱정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18세기 말에 새로운 결혼관이 등장하면서 우연히도 사회와 개인 생활의 기반이 된 전통적인 방식들에 대한 도전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후 150년 동안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결혼 생활을 버리지 못하게 막는 제약들과 행복한 결혼 생활이라는 목표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애썼다. 18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의 역사는 위기로 점철되어 있다.

 


다. 근대적 결혼관의 내재적 위험성 - 외도

[미국의 결혼 제도는 일부일처주의이며 중혼은 법에 위배된다. 최근의 일부 통계에 따르면, 50% 이상의 미국인 기혼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수치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전 세계 모든 문화권에서 실제로 간통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요점은 한 남성이 한 아내를 맞든 여러 아내를 맞든, 한 여성이 한 남성과만 결혼하든 여러 남성과 결혼하든, 결혼은 우리 인간이 보유한 생식 전략의 일부일 뿐이며, 어디서나 우리의 잡다한 짝짓기 전술들의 부차적이고 보완적인 구성 요소로 혼외정사가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실험들이 있었지만,
[1830년대 존 험프리 노이즈는 기독교적 공산주의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했으며, 그의 공동체는 1847년에 뉴욕 주의 오나이더에 정착해 1881년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한 건물에서 살았으며, 성인들은 각자 자기 방을 하나씩 가졌지만, 그 외에는 그들이 공동체로 데리고 온 아이들을 포함하여 옷가지와 섹스 파트너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동으로 소유했다. ... 오나이더 공동체의 성적 실험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노이즈가 아무리 강압적인 규제를 펼쳤어도 남성과 여성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은밀하게 짝을 이루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남녀 사이의 끌림이 노이즈의 율령보다 더 강력했던 것이다. 실제로, 서양의 집단 결혼 실험은 어느 것도 몇 년 이상을 지속하지 못했다. 마거릿 미드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이 아무리 많은 공동체를 세운다 해도, 언제나 본래의 가족제도가 슬금슬금 제자리를 찾기 마련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본래 심리적으로 한 사람의 배우자와 짝을 이루도록 만들어져 있는 듯하다. 일부일처제는 자연스러운 제도인가? 그렇다. 그러나 분명 예외는 있다. 기회만 주어지면 남성들은 흔히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고자 여러 명의 배우자를 선택하곤 한다. 이렇게 본다면 다처제 역시 자연스럽다. 한편 여성들은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불이익보다 크다면 기꺼이 하렘에 동참한다. 따라서 다부제 또한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동의 아내들이나 공동의 남편들은 늘 서로 다투게 마련이라, 남성이든 여성이든 공동의 배우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재물로써 달래야 한다. 고릴라나 말을 비롯한 많은 다른 동물들이 언제나 하렘을 구성하는 반면, 인간들 사이의 다처제와 다부제는 상황에 따라 선택하는 예외에 불과하며 통례는 일부일처제인 것이다. 인간은 달래고 부추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로 한 쌍을 이룬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유혹을 하고 매혹을 당하며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는 것이다. 이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오직 한 사람과만 결혼을 한다.]

하지만 [‘일부일처제’라는 말에 ‘정절’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일부일처제를 ‘한 번에 오직 한 사람과만 결혼하는 상태나 규칙, 혹은 관습’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는 두 배우자가 서로에게 성적으로 성실하다는 의미는 암시되어 있지 않다. 한편, 동물학자인 제임스 위텐버거와 로널드 틸슨은 일부일처제라는 용어를 ‘한 암컷과 한 수컷 사이의 장기적인 교제이자 본질적으로 독점적인 짝짓기 관계’를 일컫는 말로 사용했는데, 그들은 ‘본질적으로 독점적인’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따금 공식적인 짝이 아닌 외부의 짝과의 은밀한 관계(즉, 바람피우기)가 일부일처제의 존속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역사가 번 벌로에 의하면, 서양 역사에서 간통이 맨 처음 죄악시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헤브루 왕국 시대부터였다고 한다. 바빌론 유수 이전 초창기 유대인들에게는 간단한 성 규약밖에 없었다. 거기에서 부도덕하게 여겨지는 성 관습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바빌론 유수 이후 기원전 약 561년경부터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던 서기 70년까지 유대인들의 성 관습은 점차 엄격해졌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여성은 결혼 첫날밤을 반드시 처녀의 몸으로 맞아야 했으며, 이후 영원히 남편에게 충실해야 했다. 그러나 남성들에게는 창녀, 첩, 과부, 하녀들과의 관계가 허용되었으며, 유부녀와의 교합만이 금지되었다. 이후 서력기원의 초창기인 탈무드 시대에는 섹스에 관한 유태인의 태도가 더욱 분명해졌고, 사회적 계층에 따른 최소한의 성적 의무를 명기한 규정도 있었다. 유한계급의 신사는 아내와 매일 밤 관계를 해야 했으며, 노동자 계층은 일주일에 두 번, 여러 도시를 왕래하는 사업가들은 일주일에 한 번, 상인들은 한 달에 한 번씩은 최소한 부부관계를 가져야했다. 부부 간의 성관계는 신성한 것으로 찬미되고 축복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간통은 신에 대한 죄악이었고 이런 유대인들의 태도는 서양의 도덕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런 도덕률에도, 간통은 세계 어디에서나 보편적인 경향이다. 킨제이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전 시대를 통틀어 모든 문화권에서 소설과 전기에 기혼자들의 혼외정사 이야기가 넘쳐 난다는 사실은 간통이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임을 말해 주는 증거이다.” 간통은 미국은 물론이고 다른 많은 곳에서도 이혼과 가정 파탄을 야기하는 주된 원인이다. 그럼에도 간통이 존재하지 않는 문화권은 없으며, 어떤 문화적 방책이나 규약도 불륜을 근절시키는 데는 역부족인 듯하다.]

어쨌든, 스테파니 쿤츠는 [다양한 주장과 현상들의 배경이 된 역사적 추세를 검토하다가 모든 지역에서의 공통적인 테마를 발견했다. 그것은 모든 지역에서 결혼이 점점 선택의 문제로 변하고 있으며, 점점 힘을 잃고 있다는 것, 결혼과 자녀 양육이 예전에는 당연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든 지역에서 이 연결고리가 너덜너덜해지고 있다는 것. 또한 모든 지역에서 남녀 간의 관계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으며 때로는 그로 인해 사람들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는 것. 지난 3천년 동안의 변화보다 더 큰 변화가 지난 30년 동안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결혼의 역할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힌다.]

 



3.사랑하니까 결혼한다!
: 결혼은 사랑과 관계가 없다

위에 잠깐 언급되었듯이 근대 이후 발명된 ‘사랑하니까 결혼한다’는 의식은 오히려 급진적인 것이었다. [사랑과 결혼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개척한 사람들은 대체로 현대의 서구인들이 동반자 관계, 친밀함, ‘진정한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연상하는 평등한 파트너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돈을 위한 결혼에 관한 냉소주의를 제거하고 부부가 서로에게 최고의 애정과 정절을 바치게 만듦으로써 결혼의 안정성을 좀 더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랑과 동반자 관계를 결혼의 기반으로 삼은 것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내포된 위험을 깨닫고,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이라는 전대미문의 개념이 과격한 개인주의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랑의 결합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유선택과 평등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쉽사리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수주의자들은 만약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개인적인 결정이라면, 젊은이들, 특히 여성들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중간생략)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자제심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널리 퍼져 있었다. (생략)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반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는 단계에서 여자가 어느 누구에게도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혼자서 쾌락을 즐기는 단계까지는 금방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걱정의 원인이 된 모순들이 새로운 결혼 시스템의 안정성에 심각한 위협이 된 것은 백 년이 더 흐른 뒤였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앤서니 기든스가 언급한 “낭만적인 사랑 콤플렉스에 내재된 파괴적 특징”을 인식하고 있었다.

자유선택에 대한 찬양에서 가정의 붕괴로 곧장 이어지는 미끄러운 비탈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은 점증하는 이혼법 자유화 요구였다. 17세기 중반에 시인 존 밀턴은 이미 성격 차이가 결혼 계약 파기의 충분한 이유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중간생략) 사랑의 결합을 가장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들은 또한 이혼 개혁에 찬성하는 경향이 있었다.

1790년대 프랑스 혁명가들은 결혼을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민간 계약으로 재정의했다. 또한 사생아라는 이름 폐지, 여성의 권리 주장, 동성애 행위처벌 삭제 등 1790년대에 결혼을 놓고 벌어진 국제적인 논쟁에 정치적 입장과 상관없이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런 움직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1799년에 영국의 보수주의자 해나 모어는 소란스러운 ‘권리’ 주장이 가족 간의 유대 관계를 모조리 무너뜨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보수주의자, 열렬한 공화주의자들조차 가정 내의 질서와 위계구조를 다시 확립하려고 열심이었다. 한편 많은 여성들은 남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적, 성적으로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얻을 경우 기회가 확대되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위험에 노출될까 봐 우려하고 있었다. 19세기 무렵에는 아내를 통제하는 남편의 권위가 다시 확립되었다. 비록 이제는 통제 대신 보호라는 말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말이다.]

좌절된 사랑의 급진성 및 혼란스러운 사랑과 결혼의 관계맺음에 대해 흥미 있는 논문을 발견했다. 외도가 결혼이란 배탁적 성관계임을 전제로 했던 관념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외도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특히 결혼한 남자의 외도상대는 누구에게서나 손가락질을 받았고, 나아가 법적인 부인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이미지를 영화를 통해 남겼을 정도로 죄인 취급을 당했다. 그러나 90년대의 상담 사례에서 종종 보여지듯이 외도의 당사자들은 더 이상 모두가 죄인을 자처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외도를 정당화해준다고, 나아가 결혼관계를 해소시킬 권한을 가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중간생략) 이런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당사자들이 각각 다른 관점에서 외도라는 현상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남편과 외도상대여성은 혼인법보다 사랑이 우선한다는 가치관을 공유하지만, 법적인 부인은 남편에게 결혼한 자로서의 의무나 아이들의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환기시키거나 결혼생활에 헌신해온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다. 그러한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도가 계속되거나 아예 남편이 협의이혼을 요구해오면 부인은 간통죄라는 법에 호소하게 된다. 외도가 죄라는 관념을 지지해주는 마지막 버팀목이 법인 셈이다. ] 논자는 대략 6가지의 이유를 들어 외도 증가의 불가피성과 외도의 문제는 우리가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 놓는다. [필자는 결혼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선택하는 복지제도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4.사랑하니까 결혼한다.....
: 그런데 사랑이 모지?

[어의상의 온갖 남점 때문에 해답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종류의 합일에 대해 말하는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서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또는 ‘공서적 합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미숙한 형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앞으로 나는 전자의 의미로만 사랑이라는 말을 쓰겠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형제애는 동등한 자들 사이의 사랑이고 모성애는 무력한 자에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각기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내가 내 형제 중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는 내 아이들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나는 모든 아이들, 나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사랑과 대조적인 것이 ‘성애’이다. 성애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성애는 배타적이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전 인류를, 모든 살아 있는 자를 사랑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오직 한 사람과만 충분하고 강렬하게 융합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성애는 배타적이다. 성애적 융합, 곧 생명의 모든 면에 있어서의 완전한 위임이라는 의미에서만 성애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척하며, 깊은 형제애라는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성애는, 만일 이것이 사랑이라면, 한 가지 전제를 갖고 있다. 나는 나의 존재의 본질로부터 사랑하고 있고, 다른 사람을 그의, 또는 그녀의 존재의 본질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전제를. 본질적으로 인간은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한 부분이고 우리는 모두 하나다. 이와 같다면,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든 차이는 없을 것이다.]

 

 

2010.01.19
네오이마주(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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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2)
  • 김시원
  • 2010-01-22 13:26:59

마지막 문단이 찡합니다. 그날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성애는 핏줄이 아닌 타인에 대해 살가운 감정을 가질 수 있는, 형제애가 아닌 감정을 가질 수 있는, 벌거벗은 채 동일한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의 폭력 구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가능성 있는 진실의, 그런 공동체가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 박정숙
  • 2010-02-18 16:59:34

1.에스터 빌라 ,『사랑하니까 결혼한다고?』, 안은희 옮김, 도서출판 시유시, 1997

2.스테파니 쿤츠, 『진화하는 결혼』, 작가정신, 2009

3.『왜 사람은 바람을 피우고 싶어할까?』헬렌 피셔, 최소영 옮김, 21세기북스, 2009

4.김예숙(인천 여성의 전화 대표) ⌜외도-결혼 제도의 그림자인가⌟, 여성과 철학

5.에리히 프롬,『사랑의 기술, 2004.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위 도서들의 관련 본문 내용 편집본과 다름 없습니다. 편집장님 멋진 편집 감사드립니다. 편집의 중요성이란... 쓰읍..^^;
그리고 김시원님 마지막 문단은 에리히 프롬의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ㅎㅎ
늦장 댓글질 죄송합니다(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