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안개속의 풍경] 멈추어서서 쳐다본 풍경

 


「난 아직 믿는다.
어딘가에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난 가끔 잊는다.
어딘가에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개속에 감추어진 희망이라는 녀석은 모든 이에게 쫓기고 쫓기지만 쉽게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난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 안개속을 뒤지기 위해서 숨가쁘게 걸어왔던가. 현재가 너무 힘들어서 자주 외면했던 시간들은 그래서 부끄럽기만 하다. 멀리 떠나보지도 못하고 더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며 제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순간들은 잊고 싶어도 잘 잊혀지지 않을것만 같다. 두렵다. 나도 모르게 사라지고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희망때문에 두렵다. 이 두려움을 잊게 해줘!

 

 



<안개속의 풍경>을 보며 난 내가 가진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황량하기 그지 없는 그리스의 이곳저곳을 거치며 아버지를 찾아가는 남매의 이야기는 영화 속 배경처럼 황폐하지 않았다.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를 다 보고 극장을 나왔을 때의 느낌이 이 영화를 본 후 비슷하게 밀려왔다. 영화는 이미 다 끝났는데 다시 처음으로 다시 되돌리고 싶은 느낌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무한히 열려진 풍경속에 난 왜 그렇게 좁게 세상을 보고 있었을까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저렇게 넓고 스크린 속에 비치는 내일은 그렇게 황홀하기만 한데 난 꿈꾸었던 것마저 매일매일 포기하고 있진 않은지 내게 물어봤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1시간 이상 그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고 하루 이상 머릿속에서 되내이면 내게 그 영화는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믿는다. <유레카>처럼 <안개속의 풍경>은 그럼 감흥으로 잊을 수 없는 하루를 만들어 주었고 며칠은 '너 때문에 행복했었어.'라고 고백할 수 있을만큼 충만한 작품이다.

 

몇 년전 내게 이 영화를 꼭 보라고 말했던 친구에게 영화를 보고 나서 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미국 유학을 갔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꼭 보겠노라고 약속했지만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았었는데 영화를 보자마자 그 친구가 내게 왜 이 영화를 추천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는 내게 이 영화에서 볼라가 알렉산더의 손을 꽉 잡으며 길을 뛰어갈 때마다 몇번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나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알렉산더가 죽은 말을 보며 소리내어 울고 있을 때 볼라는 동생에게 '죽어가고 있어', '죽었어'라고 말하며 알렉산더 스스로 그 상황을 스스로 받아들이게끔 내버려 둔다. 어린 동생에게 이것은 굉장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겠지만 볼라는 그들의 긴 여정이 이보다 더 힘들것임을 어린 동생도 깨닫길 바란다. 알렉산더는 누나로 인해서 그렇게 말없이 성장한다. 어렵게 국경을 넘어 안개속에 갇힌 독일 땅에 들어섰을 때 두려워하는 누나에게 두려움을 잊게 이야기를 건네는 알렉산더의 여유는 아마도 그런 경험으로 인해 가능했을 것이다. 저렇게 어린 소년이 그 과정을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고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서 키워지지 않아도 세상은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게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볼라와 알렉산더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여린 손을 잡고 앞으로 뛰어나갈 때마다 나 역시 마음이 동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는 가끔 잊혀지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남매가 처음 만난 청년이 속한 유랑극단은 늙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여기 저기를 돌며 연극을 공연하지만 시대가 변한만큼 그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다. 군입대를 앞둔 청년은 그렇게 잊혀지는 것들에 대해서 두려워 한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것의 실체도 알지 못한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알렉산더에게 건네주는 짧은 조각의 필름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남매에게 필름 속 안개너머로 나무가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남매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알렉산더는 그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말한다. 남매에게 필름 속 안개는 그들이 가고 있는 길이고 현실이다. 그 속에 있다고 말하는 나무는 아마도 알렉산더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꿈 속에서만 잡힐 듯 나타나는 아빠의 존재와 같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가끔 햇살 속으로 그 필름을 바라보며 그 속에 있을, 햇살 너머 그들의 종착지에 있을 아버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누구는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도태되고 잊혀지지만 남매의 마음 속에서 결코, 그것이 만날 수 없는 존재라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감독은 역설한다.

그리고 멈추어섰다. 볼라와 알렉산더는 그들이 그렇게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던 큰 나무 앞에서 멈추어섰다. 멈추어서서 바라본 풍경은 실제 그들이 꿈꾸었던 풍경이기에 더욱더 아름답다. 그곳에 만나기를 바랐던 아빠가 존재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세상을 꿈꾸며 더 넓은 황무지로 가야한다고 해도 남매는 행복할 것이다. 꿈꾸었던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하여 긴 여정을 걸어왔기 때문에. 자주 멈추어서서 하늘을 보거나 풍경을 보았던 사람들 곁을 떠나 남매는 또 어딘가로 갈 것이다. 그곳이 엄마가 없고 아빠가 없는 곳이라도 남매는 행복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그 긴 여정속에서 아빠를 만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아끼고 볼라에게 첫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해주었던 청년이나 볼라를 겁탈했던 트럭기사, 간이역에서 만난 말없이 차비를 줬던 아저씨 모두 아빠의 다른 모습들인지도 모르다. 그것을 남매는 아마도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첫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된 볼라. 진실로 두려움의 실체를 없애버리고 믿음이 희망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된 알렉산더처럼 우린 덧없을지도 모르지만 안개속 풍경을 보기 위해서 가끔은 멈추어서서 바라보아야 한다.

 

 

2010.01.19
빈장원(독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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