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카페느와르] 길 잃은 어린 양을 보살피는 구도자


글을 쓰기가 두려웠다. 머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토해내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세 시간 십 칠분 동안의 숨 죽이는 시간이 끝날 때 쯤, 난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을지 걱정 되었다. 정성일의 글을 읽는 것만큼 이 영화에 대한 글도 쉬이 쓰여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어떤 이의 영화를 기대하는 그 시점에 완벽하게 도달한 <카페 느와르>가 내게는 영수가 진 십자가의 무게처럼 버겁기만 하였다. 하지만 난 써야만 했다. 그것은 어떤 의무감도 아니고 즉흥적인 선택 또한 아니었다. 단지 이 표현이 옳을 지는 모르겠지만 '기록'하고 싶었다. 2009년 10월, 가을이 불현듯 찾아온 어느 날 197분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했던 기억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가 쓴 문학작품처럼 단지 나도 그와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이것은 그가 써내려간 문학작품에 대한 감상문, 혹은 그의 영화에 대한 나의 지극히 짧은 편지.

 



재림없는 예수

'예수천당 불신지옥' 영수는 듣는다. 전철역 플랫폼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예수를 믿는 사람 천국에 갈지니 구원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불구덩이로 들어가 영원한 파멸의 늪으로 빠질 것이다. 영수는 부인한다. 현재, 그는 절망의 심정이다. 지금 그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인데 어디에 또 지옥이 있다는 말인가? 영수는 그러므로 믿지 않는다. 지옥같은 삶으로 뒤덮인 영수의 모습은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정확히 그가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목소리를 부인했던 그 곳에서. 차라리 그는 정말 그곳에(자신이 죽어 도달하는 곳에) 천국이나 지옥이 있는지를 궁금해 했을까? 아니면 죽어서 찾게 되는 곳이 이보다 더 지독하지는 않기를 믿어보고 싶었을까? 여튼 영수는 죽음을 선택하고, 이곳 / 현재- 남산타워, 청계천, 길 잃은 사람들이 부유하는 땅 / 디워, 이명박, 진중권이 공존하는 시대를 저버리고 햄버거를 우걱우걱 먹던 소녀가 바라보던 하늘로 떠난다. 아니 모르겠다. 그곳이 하늘이었는지는. 땅보다 더 깊숙한 곳이었을지도. 하지만 정성일은 영수를 하늘로 보냈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는 예수의 뒤를 따라 그 역시 '길 잃은 어린 양'을 보살피는 구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허나 이 땅에 다시는 내려 오지 않는. 피 흘리지 않는 구도자.

 

 

절망과 희망의 계속되는 변주

절망은 항상 갑작스레 찾아온다. "남편이 왔어요. 우리 이렇게 계속될 수는 없어요." 라고 말하는 미연처럼 미연의 딸은 담임선생님인 영수에게 선물이 들어있는 상자를 주며 "이 선물 꼭 받으셔야 해요. 선생님이 이 선물을 꼭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아빠가 왔어요. 지금 저기에."라고 말한다. 끔찍히도 사랑하는 미연 앞에서 영수의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남편의 귀환으로 인해서 영수를 향한 미연의 태도는 부정적이며 그 현실을 극복하기 힘든 영수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미연의 딸이 영수에게 건낸 선물은 '절망'이다. 절망을 인정하기가 힘든 영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남산 케이블카를 혼자 타고 나서 슬며시 포장을 뜯고 상자 안의 모습을 바라보는 영수의 표정에서 알 수 있다. 그의 인상이 좋지 않은 걸로 보아서 우리는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상자안에 관객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영수에게는 보이는 사물로 대치시키는 놀라운 해법을 제시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장면과 같은 장소에서 햄버거를 먹던 소녀와 소녀의 친구가 대화하는 엔딩 장면이다.

 

임신으로 인해서 절망에 빠진 소녀는 아이를 낳을거냐는 친구의 물음에 그럴거라고 답한다. 이 한마디로 결론내릴 수는 없지만, 케이블카는 점점더 올라가고 그럴 수록 소녀는 점점더 희망을 찾아가는 듯 느껴진다. 절망을 절망으로 표현했던 영수의 첫 번째 케이블카 장면과 더불어 절망을 희망으로 변주하는 소녀들의 두 번째 케이블카 장면을 통해서 감독은 자기 이야기를 한다. 영수와 선화의 관계속에서도 이 절망과 희망의 변주가 보인다. 자살미수로 그치고 다시 올라온 땅에서 영수는 한 점술사로부터 '사랑'에 관해 점을 받게 된다. 점술사는 영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미연과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언젠가 다시 여기에 돌아왔을 때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예언한다. 영수는 그 말을 믿는다. 미연의 딸이 말한 것처럼 이 넓은 세상에 자신의 절망을 구원해 줄 새로운 여인이 찾아올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영화는 1부를 마치고 흑백톤의 2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영수는 정말인지 미연을 단념한듯 한다.

 

우연히 청계천에서 만난 선화는 자신을 육체적으로도 보지 않으며 친구 또한 되어주는 영수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녀의 긴 이야기를 들어주는 영수는 자신과 선화와의 관계가 '친구' 그 이상이 아님을 인정하지만 점술사가 말해준 새로운 여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가지고 있다. 그렇게 절망을 치유해갈 무렵, 선화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남자가 거짓말처럼 찾아온다. 그러니 영수는 다시 절망으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절망의 늪으로 빠지면서도 선화를 희망으로 이끌어준다. 그가 그 긴 시간동안 선화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녀와 청계천의 긴 길을 거닐었던 모습속에서 어떤 구도자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실은 자신은 조금도 변한 것 없이 추락하지만 말이다. 영수는 그러므로 당연히 죽을 수 밖에 없다. 그가 신을 믿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길 잃은 어린 양들의 구원으로 인해서 그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를 축복하려 온 동방박사 세 사람이 예수를 찾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수는 두번 죽는다. 미연의 딸이 쓴 각본속에서, 그리고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누군가의 귓가를 괴롭혔던 전철역에서. "각본을 댁의 따님이 쓰셨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그냥 그 곳에서 죽는 것으로 연극이 끝나요. 다시 구원해서 돌아오지 않는거죠." 영수의 동료교사, 그를 끝까지 사랑했던 미연이 또다른 미연과 그녀의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성일은 절망과 희망을 끝까지 변주한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했지만 다시 살지 못하고 그저 죽는다. 그게 정성일의 영화의 모습들이다. 새해를 밝히는 첫날. 이명박 정권은 또다시 긴 목을 드러내지만 그래도 빨간 풍선은 아무말 없이 새해를 축복한다.

 

 

시와 소설, 편지의 모습을 한 문학작품

정성일은 다양한 문학의 형태로 작품을 써내려 간다. 1부가 '소설'의 모습으로 읽혀진다면 2부는 '시'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중간중간 '편지'의 양식을 빌리기도 한다. 우리는 독자가 되어서 '소설', '시', '편지'등을 모두 읽음으로써 그의 영화를 바라본다. 그가 쓴 글들은 마치 1부의 제목 <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처럼 어릴 적 반드시 읽어야만 할 것 같았던 책들처럼 단단하고 힘이 넘친다. 그것을 꺼내어 보는 것은 순전히 관객의 몫인데 그 행위를 하게끔 유혹하듯 정성일은 문학장르의 변형으로서 자신이 이야기를 나열한다. 1부가 쉽게 잘 읽히는 소설처럼 느껴지는 것은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때문이다. 하나하나의 모든 장면이 숨막힐 듯 완벽해서 좀처럼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몰입하게끔 만든다. 그래서 난 개인적으로 1부 <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 자체가 한 신도 버릴 것이 없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처럼 읽혀지는 2부 <카페느와르>에 가서는 홍상수의 <극장전>의 주인공처럼 생각하고 생각해야만 했다. 숏 자체가 매우 길게 찍힌 2부는 '현실 혹은 일상'의 모습을 담은 1부와는 대조적으로 '환상'처럼 보여진다. 선화가 그토록 길게 이야기하는 자신의 고백은 동화처럼 들리고 선물과 편지를 배달하는 은하의 캐릭터 또한 현실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화면 자체도 흑백으로 처리해서인지 느낌이 1부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지루하지만 때로는 보들레르의 시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독특하게 배치된 '편지'의 양식은 내게 무척이나 설레이고 흥분케 하는 부분이었다. 편지의 내용과는 다른 것을 읽고 있는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 관객과 만나서 똑같이 마지막 문장을 읽게 된다. 비슷하거나 관련된 내레이터의 이야기는 청각으로 스며들다가 시각으로 분주했던 관객과 같은 목소리로 마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체험덕분인지 '편지'글의 양식은 영화를 더 풍부하게 해주는 듯하다. 우리가 보는 것은 '영상'이지만 우리는 사실 3편의 문학작품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영상을 보는 우리들은 페이지를 넘기면서 때로는 운율넘치는 연을 이어가면서 정성일의 긴 문학작품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교양문학전집'을 탐독하는 소년, 소녀일지도 모르겠다.

 

 

천국과 지옥 모두

영수는 미연에게 자신이 떠날것임을 말한다. 미연의 남편이 돌아오고 나서 슬픔은 더해지고 누군가는 떠나가야 함을 깨닫는다. 그것이 처음에는 미연의 남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영수는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리곤 자신이 떠나야할 존재임을 각인한다. 그리고 한번의 미수가 이어지고 구원의 확신에 가까이 접근했었지만 그것마저 실패하고 난뒤 영수는 자신의 약속을 지킨다. 그러니 이제는 구도자가 되어 자신처럼 길을 잃은 어린 양들을 보살필 수 밖에. 그런데 그는 단 한명 구원하지 못한다. 그것은 미연의 어린 딸이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어른이 되어서 아빠가 있는 이 곳에서 나가고 싶어요." 미연의 딸은 사실 가장 절망의 늪에 서 있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수의 아픔을 감싸주고 그를 위로한다. 구도자를 위로 하는 어린 딸은 그래서 영수를 보호하는 천사의 모습에 가깝다. 혹은 정성일 감독 본인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가 사용하는 말의 대부분은 무언가를 직감하는 어른의 말투와 닮아 있다. 이것은 감독이 영수 혹은 구도자에게 전하는 메세지와 같은 것이어서 딸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기울일 수밖에 없다. 천사는 부활하지 않는 예수의 모습으로 끝나는 글을 씀으로써 구원받으려조차 하지 않는다. 구도자의 절망을 본 딸에게 세상은 또 다른 절망인 것이다. 그러니 햄버거 먹던 소녀가 마지막에 가서 희망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우리는 기뻐할 필요는 없다. 하늘 위에 서 있는 케이블카와 정 반대지점에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소녀도 존재하는, 지옥의 땅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곳 서울, 남산 타워와 청계천이 있고 디워와 이명박이 존재하는 곳에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2009.10.17
빈장원(독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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