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전속력으로 후진중인 한국의 민주주의와 [몽상가들]

 

최근 프랑스 정부가 2009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던 고등학교 교과과정 개혁안이 이례적으로 1년 뒤로 연기됐다. 자비에 다르코스 교육장관은 예정대로였다면 16일 프랑스어, 수학, 역사-지리, 과학, 외국어 2개, 체육 등을 필수 공통 과목으로 주당 21시간 이수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고교 1학년 교과 개혁안을 발표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정부는 깜짝 놀랐다. 고교생들은 물론 학부모와 교사들의 반발이 맹렬했던 탓이다. 개혁안이 연기된 결정적 배경으로 반대시위가 작용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무엇보다 정부 정책에 맞서 길거리로 시위를 나선 고등학생들을 바라보는 프랑스의 시선이 놀라웠고 또 새삼 부러웠다. 프랑스는 결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의 치기 어린 방종 정도로 그들의 정치적 행동을 바라보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의 주체적 행위를 바람직하게 여기며 반기는 분위기다. 교육부 장관은 학생 대표와 한 테이블을 두고 직접 만나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프랑스의 태도를 우리나라에서 기대하기란 요원한 일로 여겨진다. 작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둘러싸고 들불처럼 번져나간 촛불시위의 진원지에는 어린 학생들, 이른바 ‘촛불소녀’가 있었다. 그렇지만 ‘촛불소녀’를 바라보는 정부 당국의 시선은 어떠했던가. 그들이 보기엔 촛불소녀의 뒤에는 배후와 주동세력이 있었을 뿐이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몽상가들>이 떠오른다. 68년 5월을 전후로 하여 시네필인 미국인 매튜가 프랑스 파리로 건너온다. 그의 일과라고는 시네마테크에서 온종일 영화를 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매튜는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남매인 이자벨과 테오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부모님이 휴가로 집을 비운 틈을 타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들 청춘 셋은 끝도 없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하루 일과를 정신없이 흘려보낸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대담한 성적 유희에 빠져든다. 남매 사이인 이자벨과 테오는 한 침대에서 나체로 잠을 자고, 매튜는 이자벨과 관계를 맺는다. 집에 틀어박혀 그들이 뿜어내는 관능의 바깥 거리공간에서는 68년 5월의 뜨거운 혁명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다. 충격적인 장면이 뒤이어진다. 예정보다 일찍 이자벨과 테오의 부모님들이 휴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들 앞에 나체 상태로 잠들어있는 세 청춘남녀의 완벽한 무정부주의적 광경을 목격한 부모는 그들을, 깨우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용돈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집밖으로 나가 자신들의 휴가 일정을 연장시킬 뿐이다. 아마도 남매의 부모님은 그들의 치기어린 태도에서 또 다른 의미의 혁명과 저항의 징후를 목격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육체를 통해서 자신들의 출신 성분의 토대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를 정의하는 단어로 우리는 ‘관용’이라는 의미의 ‘똘레랑스’를 떠올리곤 한다. ‘똘레랑스’의 기저에는 필시 1930년대를 즈음하여 새로이 대두된 프랑스의 인상적인 철학교육이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교사는 비록 어릴지언정 학생의 인격과 자유를 기꺼이 존중했고, 학생은 교과과정의 개별적 주제들에 대하여 무엇보다 자신의 견해를 주장할 것을 요청받았다. 강의 시 노트필기는 금지됐으며, 교과서 역시 교사가 교과서에 매몰된다는 점에서 권장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이 같은 철학교육의 분위기는 오늘날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여러모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데일리 서프라이즈>에 동시 송고된 글입니다.

 

2009.01.16
이종찬(독자회원)
의견쓰기
※로그인한 회원만 의견을 달수 있습니다.
의견(1)
  • 최용진
  • 2009-01-21 16:22:33

우리 나라는 경찰의 강경진압이 무서워서 시위도 못할 판국입니다... 용산에 살고 있는데, 저희 바로 옆 동네에서 끔찍한 학살 사건이 벌어졌네요. 아, 정말 눈물 납니다. 불과 1년여만에 어떻게 나라가 이렇게 변해버렸을까요. 너무도 무기력한 제 모습 때문에 더욱 맘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