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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70] 정말 세상이 좋아졌다고 생각해?

 

일단 영화와 별 상관 없는 이야기 하나. 코미디 프로그램에 대한 뉴스가 뜰 때면 왜 요즘 코미디에는 예전과 같은 풍자와 해학이 없느냐며 성토하는 덧글이 매번 따라 붙는 것을 보게 된다. 예전의 누구누구는 이러했는데, 또 해외 코미디 프로그램의 누구는 저러한데, 어째서 우리는 코미디의 주요한 미덕 중 하나인 풍자라는 무기를 내려 놓은 채 찰나의 웃음만을 추구하는가? 라는 탄식. 그리고 그들만큼 지적인 코미디를 갖지 못하였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담긴 듯한 한마디 한마디들. 이렇게 시작된 작은 토론 마당은 대부분 수준 높은 그들의 그것에 대비되는 작금의 수준 낮은 웃음에 대한 아쉬움과 질책으로 마무리 되기 마련이다. 그래, 나 역시도 치고 받는 슬랩스틱 코미디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말장난 외에도 저 위에 높은 분들을 인정사정 없이 비꼬며 풍자하는 통쾌한 코미디를 보고 싶더란 말이지. 하지만, 이 땅의 ‘저질 코미디’를 성토하는 그들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그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만 생각해보도록 하자. 수준 높은 풍자 코미디를 구사한다는 사람들이 정말로 엄청나게 지적인데다가 남다른 문제의식과 고발정신을 갖고 있어서 웃음을 통해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고 기득권층을 풍자한다고 보는가? 아, 물론 그들이 남들 웃기는 재주 외에도 이것저것 배운 것 많고 할 줄 아는 게 많아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서 고발정신만으로 코미디를 짜진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만드는 이, 그리고 보는 이의 ‘재미’ 그 자체이다. 코미디의 주요 미덕 중 하나라는 풍자의 기능도 따지고 보면 재미를 위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 튀어나온 웃음의 한 갈래일 것이다. 다시 말해 문제점을 비꼬고, 높으신 양반들을 놀려먹는 게 재미가 있기 때문에 그리 한다는 거지 애초부터 고발정신 자체가 전제가 되는 것은 아니란 얘기.

 



오로지 비판과 고발이 목적이라면 신문에 사설을 쓰던가 시사 프로그램을 찍지 뭣 하러 코미디를 하고 공연을 하겠나. 문제는 수준 낮은 광대가 만드는 저질 대중문화가 아니라 재미를 위해 벌어진 놀이판의 신명을 억압하는 세상에 있다. 대중문화에 있어서 표현의 자유란 결국 놀이판의 신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못 놀게 하는 사회는 그만큼 경직되어 있고 권위적이기 마련. ‘저질스러운 광대’의 놀이마당도 쉽게 받아 넘기지 못해 발끈하여 실력행사에 나서는 높으신 분들께 무얼 바랄 수 있으랴. 그런 의미에서 놀려는 자와 놀지 못하게 막으려는 자의 투쟁 또한 여느 계급투쟁 못지 않은 싸움이 될 수 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곧 가장 보편적인 권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를 대하는 관점에는 여러 가지가 존재할 수 있겠지만 [고고70]이 바라보는 1970년대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바로 ‘놀지 못하게 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집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고, 짧은 치마 입으면 안되고, 머리 길면 가위질 하는데다 무슨 꼬투리 하나 잡히면 온갖 이유를 들어 금지 시켜버리는 사회. 이미 [TV 타임머신]이나 [그때를 아십니까?]류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익숙해진 우리의 지난 풍경들. 그러나 분명 그때에도 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다만 제대로 보여지지 못했을 뿐. 어쩌면 우리는 1970년대를 억압하는 기득 세력과 그에 저항하는 반대 세력간의 정치적 대립이나 통기타의 낭만이라는 몇 가지 틀 안에 가둬놓고 그려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모든 사람들이 저항의 구호 아래 팔을 걷어 부치지도 않았을 것이고 경직된 사회를 한탄하며 심오한 예술의 세계로 잠수해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꼭 거창한 예술로 승화되지 않더라도, 정치적인 구호를 동반하지 않더라도, 놀이는 놀이 그 자체로써 유효한 법. 그 놀이의 수단이 꼭 통기타와 음악다방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닐 터이니 [고고70]이 안내하는 1970년대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런 풍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복고라는 이름 아래 제공되는 점잖은 낭만이 아닌, 불경, 혹은 퇴폐스럽기까지한 금지된 밤의 열정. 그러나 이들의 열정은 오로지 놀겠다는 욕구로 충만하기에 차라리 순박하다. 시스템은 이들에게 풍기문란이니, 반사회적이니 하며 온갖 표딱지를 붙여대지만 정작 그들은 그다지 예리한 현실 감각을 지니지 못한 무딘 인물이다. 그리 정치적이지 못한 인물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희생당한다는 역설이야말로 이 영화가 증명하는 1970년대의 경직성에 대한 예가 아닐까? 그래서 난 [고고70]이 시대적 정황을 그려내는 것에 그다지 충실하지 못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둔감하게 대하는 것이 옳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혹은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시대의 공기란 막연하고도 둔탁하게 와 닿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떤 이에게 1990년대 후반이 IMF로 인한 경제 위기와 각종 대내외적 상황으로 기억 된다면 또 다른 이에게 그 시기는 구체적 사항은 희미해진 채 회사에서 잘리고 애인과 헤어진 억세게 운수 사나웠던 때로만 기억될 수도 있을 터. [고고70]의 1970년대도 그저 막연할 따름이다. 춤추고 노래하며 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세상은 이들을 놀지 못하게 막으려 든다. 왜? 노랫말에 불온한 메시지를 실어 보내서? 아니다.

영화 속 밴드 데블스가 부르는 노래는 태반이 번안 곡이다. 그러면 놀이를 핑계로 현행법을 어겨서? 이것도 아니다. 데블스를 비롯한 밴드들의 공연은 법적으로 심야공연이 가능한 장소에서 열린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 잠시 영화 속에서 빠져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 눈을 돌려 보도록 하자.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비속어는 제재를 받는다. 욕설은 당연히 전파를 탈 수 없다. 그런데 몇 년 전 이 금기를 절묘하게 비튼 희극인이 있었다. 대충 이런 식이다. ‘이런 계산기 같은’, ‘이런 수박 씨 발라 먹을 놈을 봤나’. 어감은 비슷하되 단어 자체는 표준어만으로 이루어진 대사를 구사하면서 심의도 통과하고 웃음도 주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 하지만 결과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욕설뿐만 아니라 표준어를 욕설이 연상되도록 사용하는 개그도 금지되었다. 돌이켜 보면 어느 시대에도 확실한 기준은 없었다. 구체적으로 설명도 못하면서 덮어놓고 안 된다고만 한다. 도대체 왜? 기득 세력이, 이 빌어먹을 시스템이 경계하는 핵심 대상은 법을 어기는 행위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거창한 명제 너머에 자리한 놀고 싶다는 근원적인 욕망, 그리고 놀이판의 신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고고70]의 1970년대는 이토록 당연한 권리가 침해 당하는 세상이다. 연좌제로 인생 꼬인 상규도, 이래 저래 팔자 드센 미미도, 그저 함께 어우러져 연주하고 춤추며 노래 부르고 싶을 뿐인데 세상은 그것을 못하게 막는다. 데블스의 멤버 중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1970년대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를 불문하고 기득 세력이 대중문화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려 준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심장하다. 분명 그 사건은 멤버들이 연주하던 대왕클럽의 미비한 안전대책과 부주의가 빚어낸 사고였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은 안전대책을 강화시키는 게 아니라 죄 없는 밴드 멤버들에게 된서리를 내리고 만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익숙한 상황 아닌가? 사람들은 언제나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보다는 손쉬운 희생양을 내세우는 것으로 사건을 덮어두곤 한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TV 타임머신]이나 [그때를 아십니까?]와 같은 프로그램들은 “그래, 그땐 그랬지. 세상 참 많이 좋아졌어” 라고 중얼거리고 싶은 안도감을 제공해주지만 정말로 세상이 좋아졌는지, 걱정 따위 붙들어 맬 정도로 좋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놀이판의 신명이 억압당한다면, 놀이처럼 신나게 하는 저항도 억압당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토록 바라던 통렬한 풍자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 남겨둬야 할지도 모른다. [고고70]의 1970년대는 우리가 지나온 시대의 풍경이면서 아직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현재 진행중인 싸움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미미도, 상규도, 데블스 멤버들도,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하는 투사가 되진 않는다. 이것은 영리한 선택이다. 별다른 맥락 없이 갑작스럽게 부르짖는 정치적 구호는 풍자도 뭣도 아닌, 그저 과욕일 뿐이다. 게다가 신나는 놀이판의 에너지로 질주하는 영화의 본질 자체를 훼손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신 상규와 그 일행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놀이판을 벌이고 그 위에서 신나게 노는 것이다.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하게 하는 사회라면 잘 굴러가는 사회라 할 만하다. 만약 반대로 사사건건 딴지를 건다면 그 사회는 그만큼 경직되어 있는 것일 터. 그런 의미에서 ‘한번 더 놀자’는 데블스 콘서트 포스터의 문구는 이들의 선전포고문이자 투쟁적인 정치구호이다. 한번 더 놀자는 그 한마디가 놀이가 곧 투쟁이기도 한 이 땅의 갑갑한 현실을 강력하게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라스트 공연장면에서 상규는 아수라장이 된 공연장을 뭔가 개운치 못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흔한 말로, 세상 좋아졌다고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땀에 절은 상규의 얼굴은 내게 이렇게 묻고 있는 듯 했다. “정말로 세상이 좋아졌다고 생각해?” 물론 통금은 없어졌다. 장발령도, 미니스커트 단속도 없어진 지 오래다. 불온, 퇴폐의 온상이라며 클럽들을 이 잡듯 쑤시고 다니는 일도 없는 듯 하다. 그러나 그 때 그 시절의 풍경들은 시간을 두고 계속해서 반복되어 왔다. 중학생 때는 어르신들께서 홍콩 액션영화 많이 보면 사람이 폭력적으로 변한다며 성토했고, 고등학생 때는 학교 방송실에서 점심시간 때 특집이라며 틀어준 헤비메탈 음악이 방송부 담당 교사에 의해 중간에 끊겨 버리는 사건을 목격하기도 했다. 무슨 일 터질 때마다 영화 탓, 음악 탓 하는 일이 부지기수에 어디서든 목소리는 높이지 말아야 하며 나서지 말고, 튀지 말고, 딱 중간만 가는 것이 미덕이라 배워왔다. 학생은 오로지 공부만하고, 직장인은 오로지 일만 하는 게 본분이며 주면 주는 데로, 시키면 시키는 데로, 저항의 횃불은 고사하고 개김의 촛불조차 피워 올리지 않는 것이 올바른 시민상이라도 되는 듯 교육 받았다. 급기야 난 얼마 전 있었던 직장 회식자리에서 부하직원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상사를 보았다. 여기에서 나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던져 보는 질문. 어르신들 말씀처럼 과연 세상이 좋아지고 있는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일까? 이런 의문이야말로 [고고70]이란 영화가 내게 건넨 가장 강력한 메시지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무엇인가를 끊임 없이 환기시킨다. 복고에의 낭만으로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그래도 옛날 보단 좋아진 것 아니냐는 안도감으로 현재를 포장하지도 말 것. 무엇보다 틈틈이 놀기도 할 것. 이 땅에서 때로는 신나게 노는 것도 저항이며 투쟁이기에.

 

2008.10.29
신태균(네오이마주 staf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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