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내가 좋아하는 영화 [안녕 용문객잔]과 커튼을 여는 여자

 


[안녕, 용문객잔]은 차이밍량 영화 중에서도 독특한 영화다. 이 영화는 그의 전작들이나, 이후에 나올 영화들과 스타일면에서는 비슷하다. 영화사에서 비나, 물이 상징과 은유로 쓰인 일은 너무 허다한데, 차이밍량도 그 중에 하나다. 마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빗물처럼, 그의 영화에서 비는 절대고독을 해소해줄 단비이거나, 죽음 앞에서 구원, 혹은 세기말적 뉘앙스를 풍기는 데카당스한 이미지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40분 넘게 대사가 등장하지 않는 절대적 언어, 대사 대신 액션으로 사건을 설명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점에서 [안녕 용문객잔]은 차이밍량의 다른 작품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리고 고독과 섹스, 죽음이라는 소재는 이전작품이나 이 후의 작품에서 자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이 글에서는 다룰 필요가 없다고 본다. 또한 일부 매니아층이나 시네필들 사이에서는 필독이 영화이기 때문에 굳이 이 글에서 스토리를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와 극장이라는 공간을 신비하게 그렸다는 점에서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는 낯선 영화에 속한다.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내가 왜 이 영화에 매혹 된 것인지 종종 의문을 던지곤 했다.


처음 이 영화를 본 건, 2004년 ‘무지개 영화제’가 열렸던 시네큐브에서다. 처음 봤을 때 영화 상영내내 침 한번 삼키지 못하면서 몰입했던 영화였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광화문에서 당시 자취방이있던 공덕동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얼마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안녕 용문객잔]을 다시 보았다. 이 영화에는 내가 좋아하는 장면들이 너무 많다. 나는 이 영화를 씬 별로 스틸컷을 인화해서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한다. 너무 많은 애정 표하고, 설명을 해야할 영화지만 여기서는 두 씬 정도만 언급하기로 한다.

1. 차이밍량의 영화 [안녕 용문객잔]의 오프닝은 [용문객잔]이란 무협영화의 오프닝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화면이 나오기에 앞서 나래이션처럼 사운드가 먼저 들려오고 스크린에 투사된 [용문객잔]의 화면이 나온다. [안녕 용문객잔]이 시작되면서 복화극장의 [용문객잔]이 시작된다. 혹은 그 역도 마찬가지다. 곧 이어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쇼트가 등장한다. 누군가가 극장 안을 흘깃 쳐보다는 장면인데, 차이밍량은 이 부분을 사람은 등장시키지 않고 극장 안을 들여다보는 누군가의 시점 샷으로만 처리한다. 하늘거리는 커튼 사이로 극장의 어두컴컴한 풍경이 펼쳐지는데, 아마도 누군가가 극장 문을 열고 빼곰히 안을 들여다봤을 것이다. 이 허름한 극장은 ‘복화극장’이라는 오래된 극장으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영화가 상영되어야 제격일 듯하다. 이 극장 안에는 추억 속의 영화 [용문객잔]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 곳이어 카메라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투 샷으로 잡는다. 한 사람은 머리가 백발인 어르신이다. 그 노인의 왼쪽에는 민머리에 얼핏 안경을 쓴 것 같은 남자가 앉아있다. 추측컨대 이 남자는 이 영화를 연출한 차이밍량인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장면,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극장 입구가 보인다. 카키색 옷을 아래위로 갖춰 입은 남자가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조심 물이 고인 곳을 피해서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이제, [안녕 용문객잔]이 추억하는 복화극장의 이야기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아주 거대한 시간여행.

이 오프닝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1) [용문객잔]이 시작하면서 [안녕 용문객잔]이 시작한다는 점. 2) 커튼과 극장 안 3) 차이밍량의 등장이다. 이 영화의 주체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차이밍량의 카메오 출연은 의외로 재미나게 읽힌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안녕 용문객잔]은 일종의 감상문이자, 노스탤지어 가득한 일기장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두고 굳이 ‘에세이 영화’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영화는 사적인 추억을 회고하는 형식처럼 진행된다. 만약 차이밍량이 이 영화의 주체라고 한다면, 그는 자신이 한 극장에서 겪었던 일들을 회상하듯이 영화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안녕 용문객잔]의 가장 큰 사건은 ‘복화극장’이 임시휴업에 들어가기 전 [용문객잔]을 마지막으로 상영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중심에 두면, [안녕 용문객잔]은 이제는 잊혀져가는 옛 영화 [용문객잔]에 대한 추억이며, 복합상영관이나 멀티플렉스에 밀려 리모델링을 해야거나, 폐업을 해야만 하는 ‘복화극장’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으로 만든 이야기다. 그래서 영화에는 복화극장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등장한다. 오프닝에서 비오는 극장으로 한 남자가 들어간다. 그는 영화에서 ‘일본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말한다. 이 남자는 많은 일을 겪는다. 영화 상영 내내 음식물을 먹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이 나서 자리를 옮기고, 자리를 옮겼더니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자기 쪽으로 발을 올려서 불편해한다. 또 계속해서 남자들이 자기 옆자리에 앉았다가 떠나기를 반복한다. 일본사람은 오른쪽에는 뒷좌석에 앉은 사람의 발을 끼고, 왼쪽에는 불순한 의도로 자기 옆으로 온 낯선 남자를 곁에 두고 있다.

 

한편 극장에서 담배를 피고 싶은데 라이터가 없을 때 벌어지는 이야기, 또 화장실에 갔더니 두 남자가 한 칸에서 나올 때의 황당함 사건, 창고 뒤편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찾아서 두리번거리는데, 일본사람도 뭔가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영화를 보러 온 듯하다. [안녕 용문객잔]은 한 편의 영화가 상영 될 동안 벌어진 일들을 보여주는 것 치고 너무 많은 사건들이 등장한다. 과연 이 이야기들은 하룻 동안에 벌어진 일일까? [안녕 용문객잔]은 누군가가(차이밍량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복화극장에 관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엮어 놓은 것이거나 누군가가 직접 경험했던 일을 한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동안 축약해서 집어넣은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2)의 커튼과 극장이 중요한 이유는 [안녕 용문객잔]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에피소드 탓이다. ‘복숭아 빵’을 기억하는가. 매표소 여직원이 영사기사에게 전했던 복숭아 빵은 왕가위의 영화 [화양연화]의 국수와 국수통처럼 두 연인을 이어주는 매개물이다. 매표소 직원은 조그마한 밥솥에 ‘복숭아빵’을 쪄서 절반은 자기가 먹고, 나머지 절반은 영사기사에게 가져다준다. 복숭아빵은 하염없이 영사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영사기사는 복숭아빵을 먹지 않는다. 보지 못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매표소 여자가 다시 영사실에 들렀을 때 복숭아 빵은 여자가 처음 가져다 둔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여자는 영사기사가 피다 만 담배가 필터까지 완전 연소 될 동안 기다리지만, 남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즈음에야 복숭아빵은 영사기사에게 전달된다. 아니다, 복숭아 빵이 영사기사를 만난다. 복숭아 빵은 그냥 기다릴 뿐이고, 영사기사가 불이 꺼진 매표소에서 복숭아 빵의 존재를 확인한다. 어쩌면 어두컴컴한 곳에서 복숭아 빵을 발견하는 게, 뒤늦은 사랑의 확인이 아닐까?

 

남자와 여자는 영화가 끝나는 동안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영화의 속도만큼이나 더디 움직이는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둘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서로 다른 길로 비를 맞으며 극장을 벗어난다. 어긋나는 사랑처럼 사람의 마음을 졸이는 건 없다. 그 답답함을 관객에게 물리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하듯이 영화의 속도도 느리다. 각설하고 중요한 것은 오프닝에서 커튼을 여는 주체가 누구냐는 것인데. 영화 전체를 보면 커튼을 늘 열고 닫는 주체는 매표소 여자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녀는 가끔 극장 안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갈 시간을 체크해서 청소를 하기 위해서 들어간다. 여자는 극장안을 들여다 본다. 여기서 궁금한 것, 극장안에는 누가 있었을까?

2. 여자가 커튼을 여는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텅 빈 극장 때문이다. 여자가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큰 극장을 비잉 돌아서 나오는 장면은 많은 사람의 뇌리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당분간 손님을 받지 않을 극장의 마지막 모습은 묘한 여운을 남기고, 극장에게 연민의 감정이 생길 정도다.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영화를 보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가며 영화를 봤을 그 좌석들이 텅 비어 있다.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옛 추억을 뒤로 한 채 큰 극장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이야 말로 극장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영화에 대한 애정을 담뿍 담은 쇼트다. 마치 거대한 시간이 움직이듯이, 매표소 직원의 한 걸음 한 걸음에 시각과 청각의 세포들을 곤두서게 할 정도다. 시네필들이 극장을 마주할 때 느끼는 즐거움과, 동경 그리고 사뭇 신성한 기분까지 이 쇼트에 오롯이 담겨있는 듯하다. 헌데, 이 장면 바로 직전에 우리가 자주 말하는 시네마틱한 장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끝나갈 즈음이 되면, 그 많던 사람들이 유령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오프닝을 생각해보자. 빈자리 없이 빼곡했던 좌석이, 일본사람의 에피소드로 넘어가면 극장에는 사람이 앉은 자리보다, 빈자리가 더 많아 지는 걸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자. 차이밍량이 등장한 장면(오프닝의 첫 씬)은 사실을 재구성한 일종의 재연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사람이 등장한 장면들은 모두 누군가의 추억을 재구성한 픽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 안에는 다큐적인 개인의 경험담과, 추억이 혼합되어 있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간은 [용문객잔]이 상영되는 정작 두어 시간이지만 우리가 [안녕 용문객잔]을 보면서 경험하게 되는 시간은 ‘복화극장’의 나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져갈 때, 복화극장은 그 만큼 생의 마지막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생명이 있는 것은 죽음이 가까워 올수록 가진 것을 버리고 작고 초라해지기 마련이다. 복확극장은 자신이 품었던 관객을 모두 잃고, 점점 초라해져 가는 노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비록 전성기를 함께 했던 [용문객잔]이 전우애를 지키듯이 마지막을 함께 하고 있지만, 찾아주는 이 없는 극장은 이제 역사 속에서 사라져갈 뿐이다.

오프닝에서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 둘, 유령처럼 사라지고 극장에 남은 사람은 단 세 명이다. 한 노인은 혼자서 영화를 보고 있고, 앞쪽에 앉은 노인은 손자로 보이는 꼬마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다. 이 장면이 지나면, 뒤쪽에 홀로 앉은 노인이 영화를 보며 울먹이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영화에서 두 노인은 [용문객잔]에 출연한 배우로 등장한다. 즉 이 두 노인은 이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자신들의 영화를 보러 온 것이다. 그것도 복화극장이 문을 닫는 마지막 상영시간에. 헌데, 아주 이상한 장면은 다음 쇼트부터 시작된다.


매표소 직원이 영화가 끝나가는 걸 커튼을 살짝 젖히고 쳐다본다. 그리고 영화에 종결이라는 글귀가 뜨자마자, 극장에 불이 켜지지고 여자는 커튼을 젖히면서 극장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극장을 청소하기 위해서 영화가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커튼을 젖히면서 [안녕 용문객잔]은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마술을 부리기 시작한다. 극장에 있던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극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극장에서 사라지는 걸 볼 수 있다. 나는 이 씬을 보면서, 물리적 시간을 고려했을 때는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이기 때문에 납득이 가능한 장면이다. 과감한 생략과 여운을 남겨도 관객은 충분히 전후를 고려하여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시간 동안 노인들과 꼬마가 자리를 떴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자가 청소하는 다음 컷이 노인과 꼬마가 걸어가는 장면이다.) 영화는 불필요한 장면이라면 과감한 편집이 가능하며, 점프컷을 사용해서 시간의 비약을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으레, 끝을 알리는 글귀가 뜨는 옛 영화들은 엔딩 크레딧이 없고, 여자는 커튼뒤에서 영화가 끝나는 걸 확인하고 바로 커튼을 열었다. 그렇다면 두 노인네들은 언제 자리를 뜬 것일까? 여기에 괜스레 ‘옥에티’라고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장면이 있기 때문에, 나는 [안녕 용문객잔]만이 간직할 수 있는 쓸쓸하고 애잔한 정서가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

애초에 복화극장에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스토리는 정말 엉뚱하게 그려진다. 왜냐하면 엔딩을 알리는 사인과 함께 여자가 들어섰는데,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애초에 극장에 아무도 없었거나 영화의 마지막을 같이 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소리다. 전자를 믿는다면, 복화극장의 마지막 상영은 관객 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매표소 직원도, 영사기사도 그저 자신들이 지켜야할 마지막을 의무인 것처럼, 그리고 이제는 다시 이곳에 올 수 없다는 아쉬운 감정으로 극장을 끝까지 지켰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긴긴 시간동안 매표소 여자는 영사기사가 복숭아빵을 먹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보지 못할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이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일본남자가 겪는 에피소드는 ‘복화극장’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들의 축약판으로 해석된다. 그 남자는 극장을 탐험하듯이, 극장 안에서 이곳저곳 자리를 옮겨 다니고, 화장실을 거쳐, 극장 뒤편의 창고를 기웃거린다. 일본남자에게 이름이 없는 이유 혹은 그를 호명하거나, 자신을 소개할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 남자가 그저 극장이 기억하는 평범한 관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극장안 관객들은 모두 유령이고,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시간은 과거이고, 영화가 들려주는 것은 경험이거나, 극장에 유언비어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이다. 영화 중간에 일본 남자가 창고에서 마주친 남자는 복화극장에 귀신이 있다고 하는데, 유머러스한 그 남자의 말이 이 영화의 핵심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체는, 그리고 주인공은 복화극장일지도 모른다.

 

차이밍량은 복화극장과 노인들의 기억 속에나 자리하고 있을 [용문객잔]을 주인공으로 두고 이 영화를 만든 듯하다. 그리고 사족처럼 자신의 경험과 애정을 반영한 듯 하다. 비록 극장은 텅 비어있더라도 극장은 사람을 기억하고 있고, 사람들은 상세한 기억은 못하더라도 머릿속에 흑백필름처럼 추억으로 남아 있는 복화극장에 관한 에피소드가 한 두 개 쯤 있을 것이다. [용문객잔]역시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 영화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은 많을 것이다. 차이밍량은 현재의 시간, 즉 복화극장의 마지막 상영시간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으면서도, 정작 영화 안에 채워 넣는 이야기들은 과거시제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고,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극장을 애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와 영화라는 신비한 체험을 안겨준 극장에 대한 경의와도 같다.

우리가 성장하듯이 영화도 나이를 먹었고, 극장도 몰라보게 변했다. 그리고 ‘그들만의 영화관’이 있었기에 그들만의 영화적 추억도 가능했을 것이다. [안녕 용문객잔]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그리고 영화를 위한 영화다.

 

2008.06.24
이도훈(독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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